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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리머소녀 Apr 25. 2023

내가 사랑하는 집

취향의 부재

'렌트를 연장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선택해 본 적이 있었던가? 신혼 생활을 시작했던 수리산 자락의 구축 아파트 생각이 났다. 지하주차장 없이 2중, 3중으로 주차가 되어 있어 아침마다 차를 빼달라고 이웃들에게 전화를 돌려야 하고 녹물 때문에 욕조에 얼룩덜룩 뻘건 자국이 남던 신혼집. 내가 그 집을 사랑했었나? 그 이후 2년에 한 번 전세 만기가 다가와 집을 보러 다닐 때도 그저 역에서 가깝고 가진 돈 안에서 계약할 수 있는, 이사 날짜가 맞는 집을 대충 선택했었지 집이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민 오기 4년 전에 장만했던 우리 가족의 첫 집도 많은 고민을 들여 선택한 집이 아니었기에 내 취향에 맞는 집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과연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런 거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그것을 얻어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전에 내 취향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알고나 있는 걸까?  


사십이 넘은 나이에 내 취향이 뭔지 모르겠는 이 상태가 정상적인 건지 모르겠고. 원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쟁취해 낸 경험이 부족한 것은 내 문제인지 아니면 자라온 환경 탓인지 모르겠고. 샌드위치 하나를 먹어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시켜도 넣고 싶은 것과 빼고 싶은 것이 분명한 미국 사람들, 세상만사에 자신만의 취향이 있고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살고 있던 집의 렌트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집주인은 주택관리업체(property management company)를 통해 렌트 계약을 갱신할 것인지 알려달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앞으로 1년간 렌트는 월 $50씩 올려 받겠다고 했는데, 주변 렌트 시세가 많이 오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매력적인 가격이었다.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부수적인 비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일단 계산기를 두드려 보기로 했다.


A4 용지를 한 장 꺼내놓고 집을 산다고 했을 때 고려해야 하는 클로징 비용(closing costs), 집을 보유하는 데 들어가는 세금(property tax), 공동관리비용(HOA), 주택보험, 모기지 이자, 이사비용부터 청소비용, 수리비용 등 이사 들어갈 때 필요할 것 같은 다양한 비용을 상세하게 적어보았다. 그리고 살고 있던 집에 렌트로 사는 경우와 비교해 보니, 매수한 집의 가격이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다고 가정할 때 2년 반은 살아야 겨우 렌트보다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https://www.nerdwallet.com/mortgages/rent-vs-buy-calculator에서 대략적으로 계산해 볼 수 있지만 여러 가지 비용을 고려하여 직접 계산해 보길 추천한다.) 2년 반이라는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매수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초등학교 학군 내에 한 타운하우스 매물이 올라왔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보다 더 최신식의 남향 건물에 방 세 개, 화장실 네 개짜리 집. 렌트하고 있던 집의 바닥이 가짜 나무라 물이 닿으면 벗겨지는 부분에 신경이 거슬렸었는데, 이 집은 반짝거리는 나무 바닥이 고급스럽고 예뻐 보였다. 질로우에 올라와 있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집 투어를 신청했다. 따뜻했던 일요일 오후, 우리는 그 집을 보러 갔다. 우리 동네 안에서도 고속도로 출입구 바로 앞에 있어 출퇴근에는 편리할 것 같았다. 투어 신청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동네를 둘러보았는데, 놀이터에 나와 놀고 있는 아이들이 전부다 이민자들 같아 보인 것이 특이했다. 이웃집 사람들이 마침 차고 문을 열어놓고 나와 있었는데 옆집 아주머니는 인도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고, 앞집은 중동 사람들 같았다.


질로우를 통해 나왔다는 중개인은 중년의 신사였는데, 경찰로 퇴직을 한 후에 부동산 중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서로 간단히 소개를 하고 집을 보러 갔다. 집을 투어하고 나온 앞 팀도 이민자 가족이었고 자기들끼리 다른 언어로 소통을 했다. 집이 바로 고속도로 앞에 있어서 시끄럽겠다 싶었지만 새집이라 방음이 잘 되는지 도로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타운하우스 1층에는 제법 큰 사이즈의 오픈된 공간이 있었는데 벽과 문으로 막힌 공간이 아니어서 조금 애매했다. 보통 그 공간이 프렌치도어로 분리되어 있으면 서재나 오피스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인데 조금 아쉬웠다. 바닥 자재와 부엌 수납장, 조명도 고급지고 예뻐 흠잡을 데가 없었고, 화장실들이 굉장히 넓고 새 집답게 수납공간이 곳곳에 많이 있었다. 2층은 거실이 두 개, 부엌과 다이닝룸이 한 개씩인 구조였는데, 집주인은 한쪽 공간을 포멀 다이닝룸으로 꾸며 쓰고 있었다. 3층에 올라가 보니 아이들 방 사이즈가 많이 작았다. 싱글침대 하나, 작은 책상 하나 들어가면 끝이겠다 싶었다. 안방 사이즈도 상당히 작았다. 화장실과 복도 사이즈를 줄이고 방을 좀 더 크게 만들었더라면 마음에 쏙 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것 빼고는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 집이었고, 1층의 오픈된 공간에 벽을 세워 방이나 오피스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 바로 놀이터가 있어 아이들에게 참 좋은 환경이었다.
1층 차고 옆에 넓은 공간이 뻥 뚫려 있었는데 가벽을 세우고 프렌치도어 시공을 하면 근사한 오피스가 될 것 같았다.
부엌 수납장과 바닥 색깔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원래 살던 집보다 부엌 사이즈가 아담했다.
아이들 방으로 쓸 3층 방 두 개가 많이 작았다. (사진 출처: 모두 zillow.com)


집을 다 보고 나와 주차장에서 중개인에게 이 집에 오퍼를 넣어보고 싶다고 했다. 중개인은 오퍼 넣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먼저 중개인을 선임하는 에이전시 계약(Agency Agreement)을 체결하면 좋겠다고 했다. 전직 경찰이었던 그 신사의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메릴랜드 주에서 오랜 시간 동안 상당히 큰 사건들을 담당했던 유명한 경찰이었고, 부동산 중개업 분야에서 구글 평점도 굉장히 높았다. 그날 저녁 에이전시 계약서를 보내왔길래 바로 서명해서 보내고는 오후에 봤던 그 집에 오퍼를 넣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계약서를 보내고 얼마 후, 중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까 봤던 그 집, 정말로 사랑하나요?”


하... 이 사람들은 정말 집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가 보다. 나는 그 집을 '사랑'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없었다고 했다. 지금 렌트하고 있는 집에 비해 이 집을 더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흠잡을 데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개인은 그 정도를 가지고 오퍼를 넣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그 집 driveway에서 차를 빼고 넣을 때, 그 집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베란다에서 고기를 구울 때, 그 집 침실에 누워 잘 때 만족스러울 것 같냐고 물었다. 또 그 집에서 아이들이 커 가고 가족들, 친구들을 초대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상상이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오퍼를 넣어보겠다는데 이렇게까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해주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이 중개인이 좀 순수한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중개인은 그러면서 요즘 같은 핫한 셀러마켓에서 집을 사려고 한다면 Inspection과 Appraisal을 모두 포기(waive)하고 계약서에 Escalation Clause를 넣어 집주인에게 반드시 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 조항은 오퍼가 여러 개 들어와 입찰하는 상황에서 일정 금액(예를 들어 $3,000) 단위로 오퍼 금액을 계속 올려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한 오퍼보다 조금 더 높은 금액을 주고 가격 경쟁에서 이기게 하는 계약 방식을 뜻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에 대한 오퍼 금액을 A가 $500,000, B가 $510,000, C가 $520,000을 제시했다고 하자. B의 오퍼에 입찰 시 $530,000까지 $3,000 단위로 금액을 올리겠다는 Escalation Clause가 있었다면 B의 오퍼 금액이 $3,000 단위로 $532,000까지 오르게 되며, C가 제시한 금액보다 높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세팅할 경우 근소한 차이로 입찰에서 지는 아쉬움과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으로 입찰에서 이기는 억울함을 어느 정도 배제할 수 있다.)


전화를 끊고 남편이랑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 집 가격은 이미 상당히 올려서 내놓은 것 같은데 Inspection, Appraisal을 모두 포기하고 Escalation Clause를 넣어 입찰에서 이기려고 시도해 볼 것인가. 만약 Escalation을 한다면 금액을 얼마까지 올릴 것인가. 과연 그렇게까지 할 만큼 그 집이 마음에 쏙 들었나. 이 집을 놓치고 나면 이만큼이라도 마음에 드는 집이 또 나온다는 보장이 없고 렌트 만기는 다가오는데.


밤늦게까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이 집에는 오퍼를 넣지 않기로 했다. 중개인이 왜 그렇게 진짜 그 집을 사랑하는지를 묻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사랑해야 모든 걸 감수하고도 셀러의 마음에 쏙 들만한 오퍼를 넣을 수 있을 거고, 그렇게 해야만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음날 중개인과 통화를 하면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그 집을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렌트하고 있는 집이 이런 가격에 나왔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센 오퍼를 넣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중개인이 대뜸 이러는 것이다.


"그래요? 그럼 지금 살고 있는  주인에게 집을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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