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만에 겨우 쉬는 날이다. 촬영장에서 마지막 한컷을 남겨두고 말에게 엄지발가락을 밟혔다. 모두들 내 발가락을 보러 후레쉬를 들고 몰려드는 바람에 나는 촬영장 제일 구석으로 도망가서 아파해야했다. 다행히 별로 심하게 다친 것 같진 않지만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사실 아픈 발가락을 핑계로 조금 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시간 보다 벤치에 앉아있던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또한 산책에 포함시키기로 한다. 16시8분이 되자 붉은하늘과 파란 하늘 사이로 새들이 지나가고 나는 한껏 센치했다. 뭔가 그럴듯한 생각을 하기 좋은 타이밍이었으나 난 도통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책을 읽었다. 같은 줄을 읽고 또 읽는 일이 빈번했지만 그래도 읽었다. 알라딘에서 또 책을 주문했다. 집에는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들이 더 많아졌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긴 여행 끝에 도로시는 깨닫는다. "언젠가 다시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게 되더라도 우리집 뒤 뜰 보다 멀리가지는 않을거야 왜냐면 그건 멀리 있는게 아니고 잃어버린 적도 없이 항상 나와 함께 있었어" 나도 도로시처럼 멀리가진 않는다. 뒤뜰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몸은 점점 무거워 지는데 비해 나는 증발되기 바쁘다.
감독님이 불판앞에서 소주잔을 높이들고 우물쭈물 어영부영 시간 보내지 말고 여행을 가든 뭐든 질러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당장이라도 기차를 타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여행이 재미 없을까봐, 여행을 다녀와도 달라지는게 없을까봐, 여행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설레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봐 무서워서 우물쭈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여행이란 단어 뒤에 질러보라는 말을 붙이신걸까?
<고스트 버스터즈>를 보고싶은데 집 앞에 롯데시네마는 왠지 가기 싫어서 용산 CGV를 갈까 하다가 그건 또 너무 먼것 같아서 5.8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구로 CGV를 가기로 결정했다. 노트북과 텀블러, 읽을 책과 필기구를 야무지게 챙기고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기분이 나지 않아서 전동킥보드를 탓다. 뒤에서 울리는 자동차 클락션들을 BGM 삼아 기분 좋게 내달렸다.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던 동네 속을 누비며 룰루랄라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가리봉동은 켜켜이 쌓인 빨간 벽돌의 낡은집들이 가득했다. 빨간 벽돌의 집들은 같은 모양인듯 다 제각각이었다. 아치형의 대문도 있었고 창문이 불쑥 튀어나오기도했고 창문에 섬세하게 무늬가 있기도한 집들은 1분당 100원이 부가 되는 내 킥보드를 멈춰세우기 충분했다. 도대체 빨간 벽돌의 집은 누가 지은 걸까? 건축설계사가 지었을까? 땅을 사고 땅을 갖게 된 땅주인이 지었을까? 옆집 아저씨와 동네 삼촌들이 지었을까?
담벼락마다 보이는 중국어들이 뉴스 속 조선족들의 칼빵을 상기시키며 날 무섭게 했지만 대낮에 창문 밖으로 자주색 불 빛을 뿜어내는 집이나,밖에 나란히 널어 놓은 삽과 고무장화 그리고 아기보행기는 내 우뇌를 활성화시켰다. 1분당 100원이 드는 굉장한 골목여행을 마치고 다시 구로CGV 로 가던 중 전동 킥보드는 밧데리가 다 되서 멈춰버리고 남은 2KM 걸어가야 했다. 난 이런 날씨에 폭닥 덮는 겨울 옷을 입고 잔스포츠 백팩을 매고 하릴없이 거닐면 꼭 홍상수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더라. 아무튼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무드에 취해 여행이란 뭘까 생각하며 등산복 차림의 술취한 아저씨를 지나, 낡지만 반짝이는 트리가 있는 성당을 지나 드디어 구로CGV에 도착했다. 약간의 여행을 마친 기념으로 NC백화점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는 여행이 뭔지 알것 같다. 어쩌면 여행은 집에 가고싶어지는 것이다.
일층에 스타벅스에 앉아 2021년 하반기 박지영이 제일 잘 산 물건 1위 맥북을 꺼냈다. 몇 주째 저장만을 클릭했던 글에 드디어 발행을 누르기 1분 전이다.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정말 글을 쓰고 싶다. 1분 안에 발행을 누르고 훌훌 털고 싶은데 제목은 뭐라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