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백수가 되었다. 딱 한 두달 정도 행복하고 세달 째부터 불안할 일이다. 사실 지금은 한 달과 두 달사이의 시간이라 행복하다. 지나가는 아이들도, 강아지도 귀엽고 동네에 내리 쬐는 햇살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자연에 감사하고 경의를 느낀다. 썸타는 윤성빈이라도 생긴 것 처럼 일분 일초가 설렌다. 딱 엊그제 까지 그랬다. 어제부터는 이불 속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다른 날 보다도 이불이 폭닥했고 햇살이 적당해서 낮잠을 자기 최적을 형성했다. 나는 이틀 째 집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니 우울과 무기력이라는 단어가 집 안에 벽지가 되어 발라졌다.
그치만 나는 프로 백수이기 때문에 이럴 때 절대 조바심을 느끼지 않고 더욱 무기력하고 더욱 우울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뭐든지 다 쓰고나면 새것이든 중고든 다른 것으로 교체 되기 마련이다. 적당히 비율을 맞춰서 살면 에너자이저 처럼 오래가는 건전지 인간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10년째 쏘맥 비율이나 맥주 거품 비율은 잘 맞추면서 30년이나 살아온 삶은 여전히 서툴다. 덕분에 이틀만에 집 밖에 나오고 35일 만에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으며 거의 1년2개월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역시 나는 천재백수가 확실하다. 이렇게 백수가 체질인데 세상은 나한테 왜이렇게 가혹하기만 할까.
오빠는 요즘 효도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와의 대화는 잔소리로 시작해서 잔소리로 끝나는 것을 알면서도 안부전화를 자주한다. 돈필요 할 때 아니면 연락 안하는 우리 사이에 대해 부디 다정한 오누이가 되기를 원하는 엄마의 염원을 담아 나에게 선톡을 하고 이모티콘을 남발한다. '내사 물이 제일 맛있다' 또는 '이걸 돈 주고 사먹나' 라는 말을 듣기 위해 주말에 영주에 내려가 외식을 추진하기도 한다. 오빠가 죽을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생각한 것도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마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의 열차가 무궁화호에서 KTX로 더 빨라진 것은 아닐까
엄마나 아빠가 죽으면 내가 일상 생활이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마음 한,두 구석 빼고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 심폐소생도 불가 할 것 같다. 어쩌면 우울증에 걸려 일상생활도 어렵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과를 가게 될지도 모른다. 죽을 것만 같을 지도 모르겠다. 원망 할 사람이 없어서 나를 원망할 것 만 같다. 그런데 여전히 엄마가 말을 안 걸었으면 좋겠고 제발 술 먹고 아빠가 전화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양귀자도 울고갈 모순일까. 경의를 느껴야할 자연일까.
27살까지만 해도 서울대입구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500/30 다세대주택에 살면서 치약을 끝까지 짜서 썼다. 빚지는게 두려워 신용카드는 쓰지도 않았고 체크카드에 얼마가 남아 있는지 천원단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치킨을 시켜 먹으면서 언젠가는 족발을 시켜먹는 부르주아가 될 수 있을까 상상했다. 31살이 되니까 카드값은 뒤돌아보면 100만원을 훌적 넘어 있고 족발을 시켜먹을 수 있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가 되어있다. 연출팀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 다들 약속이나 한듯 하고싶은 일을 하다니 멋지다고 한다. 글쎄 내가 하고싶은 일이 큰 소리로 OK인지 NG인지 알리고, 의상 분장까지 마친 배우가 촬영이 딜레이 되어 리허설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 갈때 정말 죄송하다고 싹싹빌고, 안전소품 몇 개가 필요한지 제작이 언제까지 가능한지 집착하며 불안에 시달리는게 내가 하고싶은 일이었을까. 모르겠다 기억도 안 난다. 정말로.
어쨌든 오랜만에 쓰는 글인만큼 그럴싸하게 마무리하고 싶은데 이것마저도 쉽지 않다. 지금 예진이가 우리집으로 엽떡을 포장해서 오고 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 놓고는 얼른 집에가서 쌓인수다나 떨며 엽떡먹을 생각 뿐이다. 몇 일 전 감독님이 내게 꿈을 물었을 때 나는 돈과 명예보다 평화를 갖고 싶다고 했다. 또 몇 일 전 생판 모르는 사람이 술자리에서 내꿈을 물었을 땐 고민하지 않는 삶이라고 답했다. 사실 내가 꿈이라는 게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잘 때 꾸는게 꿈인데 뭘 자꾸 안 자고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는지도 모르겠다. 평화를 위해 고민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가서 엽떡이나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