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의 서런던, 들끓는 열정
맨시티 홈경기 다음 날 영국 현지시간 9월 22일 일요일 런던에서 펼쳐지는 첼시와 리버풀의 빅매치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의 KTX라고 불리는 고속열차 Virgin Train을 타고 런던을 가는 도중 우리는 어제 열띤 응원으로 지쳐 뻗어 기차에서 내내 머리를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며 이동했다.
경기장 근처 숙소에 체크인을 마치고 지난주 런던에서 산 2005-06 시즌 첼시의 램파드가 마킹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이동했다. 첼시의 홈구장인 스탬포드 브릿지는 준공된 지 140년 가까이 된 경기장이어서 그런지 경기장 외관은 아름답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너무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경기장만 가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경기장 스탠드로 들어가기 전 구조물들을 보니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가 없었다. 도시 주거지역에 위치해서 그런지 담벼락과 경기장 사이가 좁아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금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와중에 사람들의 사이를 헤쳐나가며 티켓부스로 향했다.
첼시는 토트넘과 다르게 e-티켓을 지원하지 않고 티켓을 집으로 발송한다. 우리는 가져온 영수증을 인쇄해 티켓으로 발급받았다. 발급해주는 직원이 우리에게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날 경기가 매진되어 예매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분들도 이 경기를 본다고 했었는데, 공식 홈페이지에서 못 사서 대행 사이트에서 샀는데 아주 비싼 금액을 주고 본다고 했었다)
우리는 이미 티켓을 가지고 있는데 암표상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접근해 싸게 해주는 거라며 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당당하게 티켓을 보여주니 머쓱한 표정과 ‘그런 거 같았어’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에게 발걸음을 옮기도록 만들었다. 암표를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들은 가짜표를 팔기도 한다. 이 수법을 당한다면 애먼 돈만 날아가는 처사가 될 거라고 수많은 후기들을 본 적이 있다.
경기장에 들어가서는 TV로만 보던 선수들이 앞에서 워밍업을 하고 있으니 정말 신기했다. 특히 대진이 빅매치였기 때문에 경기 시간이 다가올수록 기대가 커졌다. 직접 본 은골로 캉테는 '졸귀' 그 자체였다. 작은 덩치지만 존재감을 발산하는 캉테는 눈으로 보니 왜 귀엽다고 말이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스탬포드 브릿지에서는 원정팀 응원을 어디서라도 하거나 그런 낌새가 보이면 다른 자리의 사람이 경호 요원에게 ‘이 사람 원정팀 팬이니깐 내보내라!’라며 소리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게 내 눈 앞에서 진짜 벌어졌다. 전반 15분 페널티 박스 바로 앞에서 프리킥을 얻어낸 리버풀은 알렉산더 아놀드의 환상적인 오른발로 골을 성공시켰다.
그때 손뼉 치고 환호를 지르는 사람이 내 자리 앞쪽에 있었는데, 첼시 팬 중 한 명이 ‘리버풀 팬은 나가라! 여기는 첼시다!’라며 비속어를 섞어가며 소리쳤다. 리버풀을 응원하던 그 사람은 진행요원에 인도되어 경기장에서 나갔다가 후반전이 시작하고 들어올 수 있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리버풀의 아름다운 플레이에 감탄하지 못하고 일일 첼시 팬이 되었다.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에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경기는 전반 27분 첼시의 세자르 아스필리쿠에타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따라가나 싶었지만, VAR 판독 결과 이전 상황이 오프사이드로 판정되며 여전히 리버풀이 앞서 나갔다. 그때 터졌던 함성은 경기장이 다른 곳 보다 작아서 그런지 매우 큰 환호성으로 들렸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버풀 호베르투 피르미누가 골망을 흔들며 2-0의 스코어를 만들어 냈다. 후반 들어 경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한 첼시와 함께 관중들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후반 16분 은골로 캉테의 중거리 슈팅이 골망을 흔들자 집중하던 일일 첼시 팬이 된 우리는 진짜 첼시 팬처럼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골과 함께 살아난 분위기를 이어 첼시는 동점을 위해 분투했지만 1-2로 경기를 마무리해야 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이어간 관중들은 열띤 응원을 펼쳤고 그 분위기 때문에 우리는 첼시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토트넘 팬이라는 평점심을 놓지 않았다. 런던의 연고지로 둔 팀인 만큼 라이벌 의식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경기에 뛰는 선수들보다 뜨거운 열정을 보인 첼시 팬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특히 아쉬운 패배를 맞이했지만 졌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진심으로 격려하는 모습을 보인 팬들이 정말 월드클래스 팬이라고 생각되었다.
뜨거운 용광로처럼 타올랐던 푸른 피들로 인해 축구 직관의 묘미를 느끼게 된 우리는 첼시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경기장을 나오면서도 정말 이 경기가 최고였다고 이야기하는 내 친구는 왜 여기 사람들이 축구에 미쳐있는지 알 것 같다며 계속 감탄했다.
이제 남은 경기들은 프랑스에서의 리그 앙 2경기. 무려 PSG의 경기를 연달아 보게 된다. 10일간의 영국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설렘은 여전히 여행이라는 감상에 젖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