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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고양이 Dec 30. 2020

거침없이 나아가는 예술가의 손

예술의 전당 <로즈 와일리 특별전> 리뷰


로즈 와일리, 예술의 전당에서의 전시 소식을 듣고 줄곧 기대했다. '영국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은 86세 할머니 작가'라는 문구와 세상 힙한 할머니 한 분이 알록달록하게 신문지가 뒤엉킨 작업실에 한복판에 서있는 사진이 순식간에 두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커다란 캔버스와 덕지덕지 묻은 물감, 쉽게 다가오는 이미지와 자연스레 보이는 손의 궤적 같은 것들은 그림 앞에서 복잡한 사유 없이 오롯이 눈으로 즐길 수 있도록 관람자를 끌어당긴다.


로즈 와일리의 작품은 언뜻 단순하고 쉬워 보인다.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담아내는 작가라고도 소개된다. 하지만 보기에 편안하고 즐거운 작품이라고 해서 그것이 담고 있는 무게가 가벼운 건 아니다.  

캔버스를 덧대어 수정하고 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특유의 방식이라던가, 가장자리에 종이를 추가해 작품을 넓히는 등의 방식은 그녀가 스스로 만족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로즈 와일리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이미지를 완성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실험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 규칙이나 유행을 탈피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녀의 작품 세계를 큼직하게 조립하여 선보이는《Hullo Hullo, Following on: 로즈 와일리展》에서 순수한 만족감을 느끼며 즐거운 기운을 충족할 수 있었다.   



보통의 시간들

 

Tottenham go fifth, 2020, Rose Wylie (Photo by Jo Moon Price).


일상적, 이라는 단어에서 지루함의 기운이 연상된다면, 로즈 와일리의 작품들에서 일상을 새롭게 마주하는 시선을 환기해보는 게 어떨까. 로즈 와일리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림에 반영한다. 매일 보는 텔레비전 뉴스나 좋아하는 스포츠, 익숙한 주변 사람들과 가족, 그리고 차 한잔 할 때 시선을 두는 아틀리에 창밖 풍경까지 영감의 원천은 일상 곳곳에 자리한다. 로즈 와일리에게 예술적 영감이란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경외감을 느끼며 찌릿! 하게 얻는 것이 아니다. 영감의 원천은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의 순간이며, 그런 그녀의 작업은 고백적이고 자전적이다.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보통의 시간 속에서 특별한 순간들을 채집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일상의 곳곳에서 장면을 수집해두고 글을 쓸 때 잘 버무리는 것이 진기한 경험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중요하듯이, 로즈 와일리는 일상의 이미지를 'Diary of things'라는 그녀만의 기억 저장소에 넣어놓고 그림 곳곳에 활용한다. 때문에 그녀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쉽게 공감하고 주저 없이 미소 짓는다.  



필름 노트

 

NK (Syracuse Line Up), 2014, Rose Wylie.


로즈 와일리는 자신을 영화광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필름 노트 작업은 다른 문화 영역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예술을 다른 방식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위 작품은 영화 배우 니콜 키드먼이 칸 영화제에 참석한 모습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눈으로 본 이미지를 기억 속에서 재구성하여 연속적인 동작처럼 보이도록 재배치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오리지널 영화를 보면서 느낀 흥분과 감동을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시각 언어를 만들고자 했다."


로즈 와일리가 필름 노트를 기반으로 그려낸 작품들은 그 소재가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라면 더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쿠앤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를 오마주한 작품이 반갑게 다가왔다. 극장 스크린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스케일과 자유롭게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텍스트들은 영화를 본 관객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새롭고 낯선 방식으로 감흥할 수 있도록 변모한다.


씨저 걸 


이번 전시에서는 테이트 모던의 VIP룸에 전시되었던 로즈 와일리의 회화, 드로잉, 조각 작품들을 최초로 공개한다.  

Hullo, Hullo, Following-on After the News, 2017, Rose Wylie (Photo by Soon-Hak Kwon).  


유연하게 다리 찢기를 하며 점프하는 소녀들의 이미지는 로즈 와일리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위의 작품은 길게 뻗은 다리가 인상적인데, 영국의 한 토크쇼 오프닝의 그래픽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 그녀는, 이 인기 프로그램을 자주 보면서 늘 오프닝의 그래픽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탓에 화면 속 여성들의 팔을 볼 수 없다는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전형적인 금발 머리의 핀업 걸들이 마다 속 문어와 함께 떠다니는 모습은 지극히 대중적인 미디어의 요소와 예술적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영감의 아카이브 


"로즈 와일리의 자유와 용기는 이 시대에 새로운 화화의 길을 제시합니다."

Cuban Scene, Smoke, 2016, Rose Wylie (Photo by Soon-Hak Kwon)


로즈 와일리의 관심사는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로즈 와일리는 정치, 종교, 역사, 사랑, 돈, 명성과 같은 예민한 주제들까지 과감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캔버스에 담아낸다.  

폭넓은 소재 사용은 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쉽고 친근하게 작품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떻게 하면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탁월한 센스는 그녀의 큰 강점 중 하나다.  


살아있는 아름다움

Red Painting Bird, Lemur and Elephant, 2016, Rose Wylie


로즈 와일리의 그림에는 나무, 곤충, 강아지나 고양이, 새, 말과 코끼리까지 살아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어떤 날은 그 아이의 젤리 같은 발바닥이 사랑스러워 몇 번이고 몇 분이고 눈에 담는다.


로즈 와일리도 무릎 위의 고양이 피트의 발가락 같은 작지만 생명력 넘치는 특정한 것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욕실에서 마주친 거미 한 마리, 분홍빛 혀를 축 내민 강아지, 나뭇가지를 문 작은 새까지 로즈 와일리의 손끝에서 경쾌하게 재탄생한다.    


로즈 와일리의 작품들을 가깝게 향유하면서, 이게 얼마 만에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로 관람한 전시인가, 하며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물들었다. 눈으로 접수한 예술작품을 이차적으로 머리에서 분석하고 텍스트를 열심히 쫒으며 이해해야 하는 그런 전시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의 '향유'였다.  


물론 겹겹의 의미가 쌓인 현대미술을 한 꺼풀씩 파악하는 관람 또한 무척 즐겁다. 하지만 그림 앞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기보다는 일행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편안한 자세로 그림과 소통하는 건 다른 종류의 기쁨일 것이다.


친근하고 쉬운 소재들, 일상의 순간들을 자신만의 영감 주머니로 활용하며 커다란 캔버스를 종횡무진 채워나가는 예술가, 로즈 와일리. 그녀의 거침없는 손끝에서 탄생한 정겨운 그림 앞에서 정겨운 감동을 느껴보길 바란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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