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사진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장면을 본다.
'Kunst'는 ‘예술’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로, <Mode_Kunst> 는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예술 이야기를 부드럽게 풀어낸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조용히 예술 모드를 켜고 싶을 때, 찾아와 읽어주세요.
(Nan Goldin, 1953~)
낸 골딘은 성과 에로티시즘, 그리고 그 관계성들에 대한 숨김없는 탐구를 통해 사회적 터부를 부순 사진작가다. 사진의 전통적 관례를 뛰어넘어 새로운 이슈를 제기했으며, 자신의 친구들을 오랫동안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걸터앉은 남자는 습관적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빨고 내뱉을 때마다 담배연기가 퍼지고,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채우는 동안 대화는 없다. 여자는 물끄러미 남자의 얼굴을 본다. 남자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 느슨해진 자세, 순간적으로 스치는 표정 하나까지 전부 익숙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익숙함에는 원시적인 두려움이 따른다. 몸을 웅크린 여자는 조금 춥다고 느낀다. 주황빛 노을이 두 사람을 조용히 감싼다. 뜨겁게 내리쬐던 해가 저물고 있다.
낸 골딘은 스스로 케이블 릴리스를 잡고 이 사진을 찍었다. 거짓 연출 없이 솔직하게 담은 연인과의 내밀한 순간이다. 둘은 삼 년을 함께 했지만, 한없이 친밀한 시간에도 둘 사이엔 걷어낼 수 없는 고독함이 끼어들었다. 남자에 대한 갈증과, 갈증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담긴 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한다.
이 사진은 한 인간이 자신의 방을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타인을 기반으로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불안을 보여준다. 사진 속 낸의 사적인 순간은 모든 사랑하는 사람의 보편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사진에 담긴 지나간 시간을 재구성하는 일에는 관객에게 적극적인 역할이 주어진다. 사진에 물음을 던지는 일은 자신에게 묻는 일과 같고, 거짓 없는 낸의 사진에서 우리는 깊이 공명한다.
낸은 워싱턴의 한적한 마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온한 시골 생활이 이어지다 그녀가 열여덟이 되던 해, 언니 바버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언니의 자살은 가족 모두에게 짙게 드리운 악몽과 같았고 낸의 부모님은 상실감과 죄책감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대신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들에게는 바바라의 죽음을 이웃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낸에게도 사고사라고 말한다. 그런 얕은 거짓말로 진실이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낸이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찾아내는데 집착하고,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체면이나 불편함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태도는 이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낸은 카메라로 눈을 돌리면서 집을 버리고 나온다. 1960년대 히피적 공동체 생활에 빠져들었고, 친구들과 함께 자유와 활력이라는 환상 속에 살았다. 이때부터 카메라는 이미 낸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뚜렷한 목적이나 형태가 갖춰지지도 않았지만, 당시 낸에게 중요한 건 계속해서 셔터를 누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사람과 사물과, 순간들을 고정시켜두고자 하는 욕구가 그녀를 움직였다.
보스턴에서 지내는 동안 도시의 드렉퀸들과 가까워지며 그들의 삶으로 통하는 입장권을 얻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고 일상을 나누며 모든 비밀을 공유했다. 이들의 생생한 시간들을 담은 연작물은 많은 책에 실렸고,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후에 그녀는 공동체적 삶에 들어온 많은 친구들을 에이즈와 약물중독으로 잃었다. 낸은 인간적이고 순수하게, 정직한 태도로 셔터를 눌렀다. 그 행위엔 어떠한 설명이나 판결 없이, 자기 주위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순수한 결심이 있었다.
골딘의 사진에 나오는 친구나 연인의 모습을 볼 때, 그녀가 살았거나 다녀간 장소들을 볼 때, 우리 스스로의 자그만 과거사들이 거기에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그 사람들과 그 장소들은 우리 스스로가 경험한 것들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_귀도 코스타, 큐레이터
그리하여 우리는 낸의 사진에서 우리를 본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차에서 찍은 사진은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게 반복되는 상황을 포착했다. 담배를 피우거나 맥주를 마시는 보통의 행위가 가지는 익명성은 주인공의 자리를 우리에게 넘긴다.
차창을 경계로 빛과 어둠, 밖과 안, 소음과 정적이 나란히 달리고 있다. 가까운 친구들과 같은 목적지를 생각하며 같은 차를 탔다. 그 순간만큼은 운명공동체라도 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내 비집고 들어온 각자의 침묵은 결국 각자는 개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걸 상기시킨다.
공동생활의 설렘이 고조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고독이 존재한다. 모든 인간은 서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도 운명을 공유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은 낸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로, ‘함께’와 ‘혼자’의 감정을 같이 아우르면서 이 시기를 특징지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새벽 시간은 외롭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살갗을 부딪친다 해서 덜 외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집 밖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딱딱한 구두에 발가락이 눌려 욱신거리기 시작하고, 이내 허무함과 피로감이 몰려와 어딘가 앉을 곳을 찾는다. 풀어진 자세로 발을 주무를때, 고심해서 입고 나온 오늘의 드레스는 서글프게 요란하다.
낸의 사진은 인간적 연약함의 순간들을 담는다. 처음에는 드렉퀸의 이미지와 에로티시즘을 숨김없이 드러낸 파격성 때문에 낸에게 끌렸다. 확실히 누드, 섹스, 동성애, 그리고 에이즈는 낸의 사진예술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이며, 비평가와 해설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자극적인 이미지 전에, 진실한 순간을 담아내려는 깨끗한 눈길이 있다. 한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낸 골딘은 ‘자기 주위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자’이다.
삶을 충일하게 담은 사진들 속에서 사람은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고, 그 모습은 나와 더 가깝게 겹쳐진다. 낸의 사진을 보고 던진 물음은 당신에 대한 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낸의 사진을 보고 스며오는 감정, 이는 다름 아닌 내가 지나온 나날의 한 장면에 대한 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