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입맞추는 연인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 시작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은 하나씩 사서 모으는 재미가 있다. 세로로 얇고 긴 판형에 들고 다니기에 편리하고, 여러 권을 책장에 꽂아뒀을 땐 알록달록하면서 통일성 있는 게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명화가 들어간 표지의 디자인은 그림 자체로 멋들어진다. 그것이 다른 출판사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에 끌리는 이유다. 한 점의 명화가 문학작품의 첫인상일 때, 그림은 글과 조응하여 분위기글 강화하기도 하고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민음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세계문학전집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표지에 들어갈 작품 선정은 디자이너가 주관한다. 편집자가 원고를 요약하고 콘셉트와 분위기를 정리해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면 이를 바탕으로 디자이너가 어울릴 만한 이미지들을 추린다. 여러 시안을 만들고 편집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검토하여 최종 선정에 이른다.
원고의 분위기와 호응하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이겠지만 그 외에도 한 작가의 작품들을 소장하는 독자들이 여러 권을 모았을 때 통일감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고려사항이다. 세계문학전집을 순서대로 세웠을 때 색감이 조화롭도록 책등의 컬러까지 섬세하게 고른다. 참고로 '호밀 밭의 파수꾼'은 유일하게 이미지가 없는데, J.D 샐린저가 자기 책이 출판된 때부터 표지엔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작가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그중에서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좋아한다. 샤갈의 그림과 프랑수아즈 사강의 서정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나른하면서도 세련된 소설의 분위기가 돋보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샤갈의 그림만큼이나 로맨틱하고 또 입맞춤으로 몸이 두둥실 떠오를 정도로 행복하기 때문에 두 작품이 조흥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소설 속 사랑을 로맨틱, 행복, 황홀 등의 단어로 정의할 순 없다. 오히려 불안하게 붕 떠있는 상태랄까. 사강이 묘사하는 사랑에는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인의 호기심, 불안, 설렘과 불행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샤갈의 러브스토리
그럼 우선 표지에 실린 샤갈의 그림부터 이야기 해보자. 러시아 태생의 마르크 샤갈은 1907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왕실 미술학교를 다녔다. 그곳에서 벨라 로젠필드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벨라를 두고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나의 것이었다. 마치 그녀는 나의 어린 시절과 부모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사랑이 얼마나 천진하고 순수했는지 짐작이 간다. 1910년 샤갈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 화가들과 교류한다. 이때 샤갈의 작품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몇 번의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러시아로 돌아와 벨라와 결혼식을 올리는 건 1915년으로, 첫눈에 반해 사랑한 지 6년 후의 일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행복한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듯 한 풍경과 두둥실 떠오른 두 사람의 몸. 같은 해 발표된 생일 <The Birthday>는 마치 꿈과 같은, 사랑이 충만한 순간의 황홀감이 가득한 작품이다. 샤갈은 결혼을 기점으로 온통 벨라를 뮤즈로 사랑을 그렸고 그가 그린 연인의 모습은 중력의 저항을 벗어나 말 그대로 비일상적인, 짜릿한 행복으로 가득한 순간들이다. <생일>의 두 여인을 보고 순수하게 벅찼던 첫 키스의 순간을 떠올린다는 사람도 많다.
사강의 씁쓸한 사랑
그렇다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샤갈의 그림처럼 황홀한 사랑의 순간을 이야기할까? 아니다. 사강이 그리는 사랑은 덧없고, 모호하며 난해하기까지 하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교묘히 섞여있으며 그런 일상이 배경이 되는 사랑은 한없이 수수께끼 같은 감정이다. 서른아홉의 폴은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연인 로제가 있다. 로제는 마음 내킬 때만 그녀를 만나고 젊은 여자들과 하룻밤의 즐거움을 찾기도 하며 로제에게 깊은 고독을 안겨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물다섯의 청년 시몽과 마주친다. 시몽은 폴에게 첫눈에 반하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두 사랑 사이에서 불안해하는 폴의 심리가 중심으로 사랑으로 연결된 로제와 시몽의 내면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는 물음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끝난다. 폴은 시몽으로부터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질문과 함께 연주회에 같이 가자는 권유를 받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시몽에게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내가 나 외의 어떤 것, 내 익숙한 생활 너머의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나? 의 질문으로 번진다. 그녀는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경험은 앞으로의 나아갈 지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권유에 승낙한다. 말줄임표로 문장을 맺는 이유는 이 문장이 질문이 아니라 그 질문을 곱씹는 폴의 목소리기 때문이다.
"십 년 뒤에 그녀는 혼자가 되거나 로제와 함께 지내게 되리라. 그녀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집요하게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거듭 속삭이고 있었다. 스스로도 속수무책인 이중성을 떠올릴 때면 시몽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배가되었다. "나의 희생양. 나의 사랑스러운 희생양. 나의 귀여운 시몽!"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다."
오랜 연인 로제와 새롭게 등장한 젊은 청년 시몽 사이에서 폴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사강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빛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순수한 사랑을 퍼붓는 시몽과, 고독을 안겨주는 로제 사이에서 갈등하며 혼란스러운 여인의 난해하고도 모호한 사랑이 드러난다.
다시보는 <The Birthday>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를 읽고 다시 샤갈의 그림을 마주하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이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눈을 감고 입을 맞춰오는 남자와 달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불안한 것 같기도 하다. 혹시 그녀는 발이 땅에서 떠올라 어쩔 줄 모르고 불안해하는 상태가 아닐까? 마음을 한 곳에 다잡지 못하고 붕 뜬 마음으로 갈팡질팡하는 폴이 겹쳐 보일 때, <생일>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책장을 덮은 후 마주하는 샤갈의 그림에서 눈을 꼭 감고 이미 하늘로 붕 떠오르는 남자는, 폴에 대한 순도 100%의 사랑으로 현재의 감정에 집중하는 시몽 아닐까? 검은 드레스를 입고 한 발은 땅에 붙이고 있는 여인은, 로제와 고통을 감내하며 쌓아온 6년이라는 시간, 로제를 자신의 존재 이유라 여기게 되어 그 없는 미래는 감히 떠올릴 수 없게 된 폴. 신선한 키스와 함께 견딜 수 없는 불안함에 잠기는 폴과 닮았다. 그렇게 보니 <The Birthday>는 마냥 즐거운 순간 같지만은 않다. 오히려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두 사람의 모습을 곱씹어보게 된다.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The Birth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