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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고양이 Dec 03. 2020

[Mode_Kunst]뮤즈라는 환상-메레 오펜하임

뮤즈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한 예술가가 잃은 것

'초현실주의' 하면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 말 그대로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초현실주의는 앙드레 브르통이 쓴 선언문에 힘입어 1924년 파리에서 시작된 미술 문학 운동이다. 우리의 기억 속엔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만 레이가 선명하다. 이들은 앙드레 브르통이 제시한 초현실을 추구하며 꿈과 현실, 객관과 주관, 외면과 내면을 오가는 작업을 전개했다. 이들 모두 미술사적 의의가 대단한 작가임에는 더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오늘 내가 조명하고자 하는 예술가는 달리도, 만 레이도, 마그리트도 아니다. 이 글은 만 레이의 사진 속에서 한 손을 이마 위에 짚고 어깨너머를 응시하는, 메레 오펜하임에 대한 이야기다. 


메레 오펜하임, 뮤즈


메레 오펜하임은 1913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세계 1차 대전 발발 후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로 이주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열여섯이 되던 해에는 예술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와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오펜하임은 정신분석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노트에 꿈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고, 스위스에서 많은 예술가를 접하며 일찍이 전위적 미술에 눈을 뜬 '예술가'였다.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추구했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열여섯의 오펜하임은 존재 자체로 그들이 목말라하던 그 무엇이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오펜하임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봤다. 정신분석학자 아버지와 예술가 이모의 영향을 받고 자란 아름다운 소녀는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로 하던 신비로운 '뮤즈'의 역할에 딱 들어맞는 열쇠였던 것이다.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여자, 뮤즈라니. 당시만 해도 예술가들은 여자란 남자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는 될지언정, 자신과 같은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는 오펜하임의 젊음, 매력, 개방성, 예술성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21살의 오펜하임을 자신의 뮤즈이자 모델로 내세우며 다양한 누드 작품을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메레 오펜하임의 초상>(1933)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모피 위의 아침식사 


당시에 여성은 남성 화가들 앞에서 모델이 되어주거나 영감을 자극하는 뮤즈의 역할에 캐스팅되는 정도로만 예술계에서 존재할 수 있었다. 오펜하임은 항상 이 한계를 넘어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길 원했고 1933년 처음으로 '자코메티의 귀'를 만들어 <초현실 독립 살롱>에 전시했다. 이때의 작품이 대중의 주목을 받진 않았지만, 그녀가 직접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남성 미술계에서 일어난 '초현실'의 실현이었다. 

1936년, 오펜하임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인 'Object'를 선보이게 된다. 일상적인 사물인 찻잔과 스푼, 컵받침을 모피로 감싼 이 작품은 입에 닿는 찻잔에 어울리지 않는 짐승의 털을 병치함으로써 불쾌한 감각을 유발한다. 찻잔이 상징하는 문명과 모피가 상징하는 야생의 비문명, 이 둘의 결합은 초현실주의가 꿈과 현실의 대립항 사이에서 제3세계를 추구한 것과 같은 이치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 작품에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다. 찻잔의 입에 닿는 속성과 모피의 털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 작품에 '모피 속의 아침 식사'라는 제목을 붙인다. 


같은 해인 1936년, 메레는 '나의 간호사'를 선보이는데 이 작품에서는 에로티시즘이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은색 쟁반 위에 뒤집힌 채로 놓인 한 쌍의 하이힐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흰색의 하이힐은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 같으면서도 더럽게 때가 묻어 있고, 쟁반 위에 서빙된 모습은 식인 의식까지 연상시킨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거의 모든 성적 페티시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그녀는 파격적인 작품들을 연달아 선보이며 초현실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오펜하임의 초기 작품들은 이성에 의한 여성의 성욕과 여성 착취를 암시하는 일상적인 물건들로 구성되었다는 게 특징이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잠재적 에로티시즘은 남성이 주도하는 미술계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오펜하임은 예술계에서 여성은 모델이나 뮤즈, 기껏해야 여주인 정도에 머무를 수 있다는 당대의 편견을 보란 듯이 깨버린다.  


깊고 긴 슬럼프


하지만 젊은 시절의 성공과 유명세는 안정된 커리어로 이어지지 못했다. 개인전을 마치고 1937년에 바젤로 돌아온 오펜하임은 큰 슬럼프에 빠져 한 동안 모든 창작 활동에서 손을 뗀다. 열여섯에 파리에 던져진 오펜하임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녀에게 달려들었던 남성들은 어린 소녀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또 무엇을 얻었을까?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느꼈던 불안과 우울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녀를 덮쳐왔다. 


사실 이 시기는 그녀가 막스 에른스트와 사랑에 빠졌던 해이기도 하다. 물론, 에른스트는 유부남이었다. 메레 오펜하임에 대해 조사하던 중 그녀가 왜 그렇게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오랫동안 고생했는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는 기사를 봤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여성의 예술적 참여를 허용하지 않던 풍토에서 뮤즈로써 역할을 소화하면서, 과연 자신이 예술가인가 하는 의구심에 시달렸을 것이다. 


슬럼프 기간에 메레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지만  암흑기를 보내면서도 회화와 조각을 개인적으로 실험하며 예술성을 탐구했고 1945년에는 사업가 라 로슈를 만나 결혼하면서 안정된 심리 상태를 되찾는다. 결혼 이후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건 절대적인 안정감의 속에서 가능하다."라고 말하며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그녀가 다시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설 준비가 되었다는 선언이었다.


메레 오펜하임, 예술가

1959년, 오펜하임은 <봄>이라는 작업을 선보인다. 처음 며칠은 오펜하임이 직접 식탁 위에 누웠다. 이는 다산과 자연을 아낌없이 축복하고 잔치를 연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한 작업이지만, 여성을 식용과 소비의 대상으로 착취했다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살아있는 신체를 작품의 맥락에 포함시켜 전시하는 이 파격적인 방식은 현대미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방하는 원형이 되었고, 지금은 <봄>이 단지 여성의 착취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유희적 요소와 불쾌함을 의도적으로 혼합한 것으로 다시 평가되고 있다. 


가만히 포즈를 취하며 초현실주의자들의 뮤즈로써 존재할 때, 오펜하임은 분명 아름다웠고 또 유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고, 우울했다. 뮤즈라는 환상은 여기에 있다. 오펜하임은 70세가 넘어서까지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같은 시대에 함께 작업했던 남성 예술가만큼 유명해지지 못했다. 쉽게 누군가의 뮤즈로 기억되었다. '뮤즈'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그녀가 잃은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오펜하임의 가치는 그녀가 죽고 10년이 지난 1996년, 대규모의 회고전이 개최되며 재평가되었다.  그녀의 작품이 생애 동안 얼마나 적은 수만이 전시되었는가를 고려하면 오펜하임이 미래 세대에 남긴 영향은 가히 기념비적이다. 


미국의 1세대 페미니즘 미술가 주디 시카고는 여성의 신체를 정면으로 내세워 남성 중심 사고에 대항했다.  오노 요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맨디에타, 캐롤리 슈네만은 자신의 신체를 예술의 오브제로 사용했다. 그 이전에 메레 오펜하임이 존재한다. 뮤즈가 아닌 예술가로 말이다. 예술가 메레 오펜하임을 기억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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