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 샌프란시스코 ① 항구와 도시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꼭 꽃을 다세요.’
결혼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엄청난 연휴가 찾아왔다. 그게 바로 지금도 잊히지 않는 2017년 근로자의 날 연휴다. 전설의 4말 5초. 아마 사회에 나온 이후 가장 길었던 연휴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 분명하여 아내와 국제선 몇 군데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 고민을 하긴 했던 건지 ─ 샌프란시스코로 정했다. 우리 부부는 참 이럴 때 과감하다.
한국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비행기여서 그랬을지, 돌이켜 보니 기내에서의 기억은 많지가 않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거나 늘상 그렇듯 밀린 영화들을 한참 보며 도착했을 것이다. 짐을 찾아 공항을 나와 보니 샌프란시스코의 오후는 기가 막혔다. 이 곳의 하늘은 다른 곳들과 비교해서도 유난히 파랗고 깊어 보이는데, 기온 또한 5월 그 자체로 선선해서, 위에 가벼운 외투나 남방만 하나 걸치면 활동하기 아주 좋았다.
우버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데, 기사가 익살스러웠다. 워낙 짧은 영어라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샌프란시스코는 물가가 너무 비싸다, 저기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너무 비싸서 비어 있다, 곧 무너진다는 소문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 주었고, 한국은 한 끼 식사가 얼마 정도 하냐 묻기에 얼마 정도 한다 대답해 주었던 기억도 나는데, 아내가 대화를 잘 이어 나갔다. 회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작심만 한 번 더 했던 것 같다. 여담으로 우버를 타고 지나가던 중에 유비소프트 사옥도 얼핏 보았던 것 같은데, 이래 저래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와서 이 곳을 배경으로 한 게임 타이틀을 하나 샀는데, 이 역시 제작사가 유비소프트라는 사실.
샌프란시스코는 생각보다 큰 도시는 아니었어서, 공항에서 숙소까지 차로 30분 남짓 걸렸던 것 같고,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마음만 먹으면 걸어 다니며 볼 수 있을 듯하다.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 있는 클럽 쿼터스에서 묵었는데, 마천루들 사이에 위치한 중간 높이의 클래식한 외관을 한 호텔이다. 바로 근처에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가 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삼각뿔 모양의 이 건물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물 1001선에도 꼽힌다고 하는데, 처음 봤을 때 북한의 류경 호텔을 떠오르게 한다. 류경 호텔보다는 더 날카롭긴 하다. 눈에 띄긴 하지만,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마천루들 사이에서 크게 이질감은 없다. 다만 설계 초기에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샀다고 하는데, 한 편으로는 샌프란시스코 항만의 시야를 최소로 가린다는 점에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지역의 호텔은 대기업 쪽 출장자들이 워낙 많은 곳이라 비싸고 좁다고들 했으나, 생각보다 공간은 넓었고 편안했다. 아마 유럽의 호텔이나 민박을 생각하고 가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저녁에 출발해 미국 시간 오후에 도착했기 때문에, 여독이 크지는 않았다. 짐만 풀어놓고 시내로 나와 걸었다. 유럽과는 다르게 잘 정돈된 도로와 빌딩 숲들이 헐리우드 영화에서 익히 보던 그 모습들과, 도로 위에 깔린 케이블카 선로가 설렌다. 아, 여기가 미국이구나 싶었다.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무렵이었으므로 멀리 가지는 않고, 호텔과 가까운 유니온스퀘어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햄버거는 내 인생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다. 바로 그 햄버거의 나라에 왔으니, 응당 햄버거를 먹어주는 것이 인지상정. 내 미국 여행 목적의 절반은 햄버거라 해도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게 이름조차 위대하다. ‘SuperDuper Burger'. 수퍼에 두퍼까지 있는 햄버거. 가슴이 뛰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금방 나오는 햄버거는 위쪽 번이 덮이지 않은 채로 나오는데, 그 번 안 쪽에 알파벳 S와 F가 소스로 데코레이션 되어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약자를 적어 둔 것이다. 그 센스에 감탄을 했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겨 둘 것을, 그냥 번 덮어서 입에 욱여넣었나 보다. 패티 두 장에 치즈를 올린 이 햄버거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크게 한 입 깨물었을 때, 먼저 자그르르 흘러나오는 육즙이 숱하게 먹었던 햄버거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이 압권인데, 이 육즙이 잘 녹은 치즈와 함께 뒤섞인다. 턱을 위아래로 움직여 본다. 알알이 씹히는 패티의 식감이 대단했다. 후술 할 쉑쉑의 건강한 느낌과 파이브가이즈의 헤비함 그 중간 정도에 있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내 취향 상 쉑쉑 보다는 훨씬 낫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사이즈 자체가 크고, 패티에서 흐르는 육즙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퍼였고, 두퍼였다.
본토 햄버거로 세상을 얻은 듯한 포만감을 가득 안고 유니온스퀘어로 향했다. 이 곳의 명칭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 지지자들이 데모를 한 광장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백화점과 상점들에 둘러싸인 상업의 중심가로 보면 될 듯하다. 더해서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케이블카가 광장 주변을 오가는 모습에서 현대와 전통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화점에 들러 옷을 몇 벌 장만했다. 미국에 왔으니 폴로를 사야 한다(?) 아무튼 폴로 티셔츠와 남방을 샀다. 남편만 득템하네요 했던 아내에게, 이 책을 쓰는 오늘도 무한 감사하다.
시간이 금방 흘러서 해질 무렵이 되었는데, 시내의 진가는 야경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은은한 조명이 거리를 비추고 천천히 달리는 차들에서 도시 저녁의 여유가 느껴진다. 여느 여행처럼 아내와 손을 잡고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즐겁다. 아마 즐거운, 또 실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웃으며 걸었으리라.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의 첫날은 저물었다.
둘째 날 아침 일찍부터 시내 탐험에 나섰다. 엠바카데로 역까지 어가는 중에 아침식사를 위해 베이글 맛집엘 들렀다. 'Noah's NY Bagles'라는 곳인데, 출근하는 직장인 몇몇 틈에 섞여, 나는 휴가지! 하면서 알루미늄 포일을 열었다. 시금치가 조금 올라간 채로 튀겨 나온 독특한 베이글이다. 모락모락 나는 김을 불어가며 먹는 바싹 익힌 베이컨이 들어간 그 맛. 꿀맛. 그리고 든든함. 미국 음식 느끼하기는커녕 나는 솔직히 삼시세끼 다 챙겨 먹으면서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특히나 커피를 알아서 양껏 따라 마시는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 한 번 더 들러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엠바카데로 지하에서 몇 정거장이면 미션 돌로레스파크에 도착하는데, 처음엔 지하철인 줄 알았던 이 전철은 지상으로도 나와 트램처럼 도로 한가운데를 달린다. 달린다는 표현은 너무 빠른 듯하고, 사실 천천히 달리는 버스에 가까운데, 이 또한 색다른 경험이다. 우리는 빨리 가지 않아도 되는 여행객들이었으니, 그 덕분에 작은 가게가 딸린 낮은 건물 건물들을 구경할 시간이 생긴다. 각각의 오랜 세월들이 느껴짐과 동시에 또 그만큼 각각의 색깔을 하고 서 있다. 주거지역이나 작은 상점가 모두 다양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인 도시다.
넋을 놓고 창 밖 구경을 하다 보면 금방 돌로레스 파크에 이른다. 구름 한 점 없는 온화한 날씨에, 넓게 펼쳐진 잔디 언덕 아래로 샌프란시스코 시내까지 시야가 탁 트인다. 한두 명 씩 잔디밭에 앉아, 누워, 엎드려 있고, 반려견과 산책하기도 한다. 미국식 여유 그 자체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면 샌프란시스코에는 돌로레스파크 만큼 크지는 않아도, 잔디가 깔린 넓은 공원이 곳곳에 있다. 항구 도시로 발달해 지금은 미국의 IT와 금융, 상업의 중심이면서도 도시 중간중간에 이런 공원들이 있고 여유를 즐길 수 있으니, 물가가 워낙 높은 게 문제지, 그것만 뺀다면 미국인들도 평생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도시라는 말도 백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동쪽 해안은 위아래로 길게 부둣가들이 ‘Fisherman’s Warf’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부르는 음역어 이름이 ‘상항’이니, 샌프란시스코는 옛날부터 항구로 발달한 도시답게 해안과 맞닿은 곳들에 부두가 줄지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슷한 소리의 그럴싸한 이름을 잘 지어내는 것 같다. 프랑스는 불란서, 로스앤젤레스는 나성, 싱가폴은 신가파 혹은 성항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우리는 이 부둣가 ‘Fisherman’s Warf’ 지역의 Pier39로 이동했다. Pier39는 쇼핑과 함께 해산물 요리를 비롯한 각종 엔터테인먼트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1970~80년 경에 재조성 되었다고 한다. 시내버스를 타고 부둣가에 내리면, 큰 광장에 색색의 깃발이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가운데서 버스킹이 펼쳐지고, 그를 에워싸고 구경하는 전 세계에서 모인듯한 사람들이 있다. 아주 활기찬 곳임이 대번에 느껴진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목조 이층 건물들이 바닷가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 곳 식당에서 클램차우더라는 음식을 처음 접했다. 아내가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음식 중 하나였다. 둥근 빵 안에 하얀 수프가 들어가는 음식이라, 겉모습은 빠네와 비슷하다. 첫맛은 조금 비릿했는데, 그게 정말 비려서가 아니고, 그때까지도 나는 조개류가 이 수프에 들어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수프는 한 번 입에 대면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번갈아 씹히는 감자의 부드러움과 쫄깃한 어패류에 더해서 촉촉한 빵의 식감들이 나에게 꼭 알맞았다.
기념품 상점을 몇 군데 들러 자석을 좀 사기도 했던 것 같고, 그렇게 부둣가 끝까지 걸어가면 고대하던 바다사자들을 만날 수 있다. 상쾌한 바다 냄새와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면, 그 건너 바다에 나무판자들이 떠 있다. 그 위에 바다사자들이 무리 지어 일광욕을 하고 있는데, 울음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려 퍼지는 게 재미있다. 어른 웃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바다사자를 보며 즐거워하고, 바다사자는 사람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로 마주 보며 살아가는 모습이 새삼 놀라웠던 것 같다.
우리는 바다사자를 보고 잠시 그곳을 떠나 유람선 선착장으로 움직였다. 알카트라즈 교도소 투어에 가기로 한 것이다. 우와 영화에 나오는 교도소까지 가 본다니, 이 여행은 정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유람선을 타고 섬까지 들어가면서 보았던 골든게이트 브릿지와,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높은 파도를 헤치며 운항하는 컨테이너를 잔뜩 실은 거대한 상선을 코 앞에서 보면서 이 여행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한다. 알카트라즈 선착장에 내려 오르막길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교도소가 나온다. 오디오 가이드가 한글로도 대여가 가능한데, 탈옥수들의 대화가 재연되어 있기도 하고, 심지어 성우도 우리나라 전문 성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알카트라즈는 우선 재소자 처우가 매우 열악한 동시에 탈옥이 불가능한 교도소로 악명 높았다고 한다. 이 곳에서 찍어 온 사진 중에 이런 문구가 있다. “Break the rules and you go to prison, break the prison rules and you go to Alcatraz.” 아마 당시에 알카트라즈는 교도소계의 끝판왕이었던 듯싶다.
게다가 어린 시절 007 시리즈처럼 명절마다 TV로 보았던 영화 더록의 배경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익숙한 곳인지라, 다른 곳보다 더 새로운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또 이 교도소는 전망이 기가 막힌다. 샌프란시스코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마침 날씨가 좋아서 시내의 마천루들과 여유롭게 유영하는 요트의 모습이 멋있게 어울린다. 아마 이런 전망도 이 곳이 유명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여담으로 수감자들은 밤마다 빛나는 도시의 야경에 무척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탈옥이 불가능하다고는 하나, 실제 탈옥을 시도한 사람들과 성공한 사람도 꽤나 있었던 것 같고, 탈옥 중 실종된 이들의 일화도 유명했다. 특히나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는 상어가 득실거려서 아마 죽었을 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믿거나 말거나다. 알카트라즈섬에서 다시 유람선을 타고 나올 무렵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다시 Pier39로 가서 조금 품격 있는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Crab House’라는 곳이었는데, 입구부터 진한 버터와 마늘향이 기억에 남는 곳이다. 아마 게 요리를 대부분 버터에 굽거나 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에 걸맞게 바닥이 아주 미끄러웠다. 자리에 마주 앉으면 점원이 앞치마를 직접 목에 둘러준다. 나비넥타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트에 웃으면서 식사를 시작했던 것 같다. 게 요리는 살을 발라먹어야 해서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큼직한 게와 새우가 맛있어서 아주 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식사 내내 식당에 연기가 조금 있고 몸에 밸 정도로 향이 진했긴 하지만, 나름 부둣가 식당에서 먹은 별미에 대한 추억 정도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Pier39의 상점들이 저녁을 밝히고 있었다. 조그마한 광장의 회전목마도 소소한 전구를 빛내며 돌아가고, 건물의 난간을 둘러감은 조명들도 빛나고 있었다. 낮에 봤던 활기와는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마치 놀이동산에서 그러한 것처럼 페스티벌 행렬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축제 분위기였다. 저녁이 되었지만, 숙소에 돌아가기엔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인지라 우리는 조금 더 근처를 돌아다녔다. 기라델리 초콜릿에 들러 초콜릿도 사고, 벽돌 건물들과 상점가 구경을 한동안 하다가, 케이블카의 종점 정도로 볼 수 있는 비치앤하이드 정류장 근처의 바에 들렀다. ‘The Buena Vista’. 사람들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하루를 마치고 저녁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그 안에 스며들어 맥주를 한 잔씩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낯선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를 잘 마치고 돌아가기 전 조용히 맥주 한 잔 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말이다. 아마 그 저녁에도 우리는 그러한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바에 하루의 아쉬움을 묻고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점잖고, 멋지게 세월이 묻은 케이블카는 샌프란시스코 특유의 언덕 언덕을 달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특히나 언덕을 오를 때면 뒤로 보이는 푸른색, 붉은색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띄엄띄엄 켜진 가로등 사이로 조용히 불 켜진 집들, 하루를 마쳐가는 샌프란시스코의 밤은 잊고 싶지 않은 장면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