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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재 Jul 02. 2020

피기 시작한 무궁화 꽃

따뜻한 밤

  나한테는 두 명의 조카가 있어. 두 명 모두 아들인데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몰라.

그런데 얼마 전에 일곱 살인 큰 조카가 많이 아파서 한 달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금식을 해야만 했어.

  조카는 금식이 끝나면 먹고 싶은 음식들이 너무 많은데

그중에서도 외할머니가 삶아준 따뜻한 밤이 너무 먹고 싶다고 말하더라고.     

  나도 정말 맛있게 먹었던 밤이 있었는데 그 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2013년 가을이었어.

  나는 2013년 3월부터 경찰시험을 목표로 공부를 했는데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3월부터 8월까지는 독서실 총무를 하면서 공부를 했었어.

  그런데 내가 총무로 일하면서 공부를 했던 독서실이 공사를 해야 돼서 두 달 정도 문을 닫아야 한다는 거야.

  2014년 3월 시험을 앞둔 나에게는 두 달은 너무 긴 시간이라서

다른 독서실을 다니려고 알아봤는데 총무를 구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어.

     

  내가 집에서 공부를 한다고 해도 책값과 동영상 강의 비용까지 필요한 돈이 있는데

차마 엄마에게 달라고 말을 못 하겠어서 일용직 알바를 다니기로 마음먹었어.

  내가 일용직 알바를 다니면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면 속상해하시고

못하게 하실 것이 분명해서 엄마 모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봤어.

 

  그러던 중 경찰서 바로 옆에 24시간 운영하는 독서실을 알게 되었고

허름하지만 샤워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일용직 알바를 해도 엄마 모르게 할 수 있겠더라고.

     

  그리고 무작정 인력사무소에 다 전화를 돌렸어.

  25살 여자인데 체력 좋고 힘도 좋아서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으니까 일거리 좀 달라고 말을 했는데

사장님들의 반응은 다 똑같았어.


  25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한 곳에서

“학생 밤 줍는 일 할 수 있겠어?”라고 물으셨고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네. 잘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을 했더니

바로 다음 날 새벽 4시 반 까지 인력사무소 앞으로 오라고 하셨어.


  그렇게 나는 24시간 독서실에서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의자에 기대어 4시간밖에 자지 못한 채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20분 정도 걸어서 인력사무소에 찾아갔어.     


  9월이었지만 새벽 날씨는 꽤 쌀쌀했어,     

  내가 처음 경험한 인력사무소는 사무실 앞에서 큰 드럼통에 불을 지피고

아저씨들이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는 모습이었어.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모습이 바로 내 눈 앞에 보이니까

뭔가 모를 긴장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더라고.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발걸음을 돌릴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도망치면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결정하고 마음먹은 일인 만큼 그리고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만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사무실에 들어갔어.     


  인력사무소 사장님과 인사를 했고 조금 있으면 흰색 봉고차가 오는데

밤 농장 사장님 차니까 그 차를 타고 가서 일을 하고

저녁 5시에 일이 끝나면 다시 인력사무소까지 태워다 준다고 하셨어.

  그리고 일당 9만 원을 받으면 그중 1만 원은 인력사무소에 주고

나머지 8만 원은 내가 가지면 된다고 하더라고.     


  하루에 8만 원이면 내가 9월 한 달을 빠지지 않고 일 했을 때 240만 원이라는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2014년 3월 시험까지 수험비용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니까 두려움은 사라지고 웃음이 절로 나더라고.     

  조금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흰색 봉고차가 내 앞에 멈췄고

밀짚모자를 쓰신 아저씨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나에게 차에 타라고 말씀하셨어.     


  봉고차 문을 열었더니 우리 엄마랑 비슷한 나이 때의 아주머니부터 60대 어르신들까지 먼저 타고 계셨고

어른들 사이에 나 혼자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25살밖에 안 된 여자가 일용직 알바를 하러 온 것이 신기하셨는지

질문이 끊이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밤 농장까지 가게 되었어.     


  밤 농장에 도착해서 농장 사장님이 내 발에 맞지도 않은 장화와 밤을 주워 담을 가방을 챙겨 주시고

어르신들 따라서 하면 어려운 일은 없다고 무작정 일을 시키셨어.     

  그렇게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어른들을 따라나섰고

내 앞에 펼쳐진 장면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장면이었어.

아마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였다니까.

만 팔천 평 면적의 산이 내 눈 앞에 있었고 평지도 아닌 산이었던 거야.

일당 8만 원이라고 좋아했던 마음은 금방 사라지고 내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     


  새벽 5시부터 밤을 줍기 시작하는데 허리에 찬 가방에 밤이 어느 정도 차면

허리가 너무 아파서 걷는 것보다 기어 다니는 게 편할 정도였어.

  가방에 밤이 다 채워지면 포대자루에 옮기고

포대자루마저 다 차면 포대자루를 굴려서 산 아래로 가지고 내려오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10시에 사장님이 새참을 가져다주시는데

보통 부침개나 감자, 고구마, 과일을 챙겨주셨지만 나는 시원한 얼음물이 제일 맛있었어.

  그리고 12시에 점심을 먹고 저녁 5시가 되면

하루 동안 나에게 주어진 일이 모두 끝이 났고 독서실로 돌아왔어.     


  독서실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자리에 앉으면 저녁 6시였고

그때부터 새벽 1~2시까지 공부를 하고 의자에 기대어 2~3시간 자고 일어나서

밤 농장으로 일하러 가고 그렇게 한 달을 딱 보냈어.


  밤 농장에서 일하면서 뱀 보고 놀라기도 하고 장화가 발에 맞지 않아 온통 물집이 잡혀 아프기도 했지만

함께 일했던 아주머니들과 농장 사장님이 나를 딸처럼 정말 잘 챙겨주셨어.     

  마지막 일하는 날에는 그동안 고생했다면서 농장 개울가에 돗자리 피고 앉아 삼겹살을 구워주셨는데

개울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가재가 살고 있었어.


  사장님께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한 정신력이라면

경찰시험도 꼭 합격할 거라고 고생했다며 하루치 일당을 더 주셨고

집에 가져가서 먹으라고 밤 한 박스도 함께 주셨어.

  그리고 엄마한테는 친구가 준 밤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가져다주었고

엄마가 삶아준 그 밤이 내 인생에선 가장 맛있었던 밤이야.     


  올 가을에는 내가 일했던 밤 농장 사장님을 한 번 찾아가 보려고 해.

  7년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잘 지내시고 계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경찰시험 준비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일 할 기회를 주신 고마운 분이시니까

꼭 한 번 찾아뵙고 감사했다고 덕분에 합격해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고 늘 건강하시라고 인사드리고 싶어.     


  “사장님 2013년 9월 한 달 동안 밤 농장에서 일했던 학생 경찰시험 합격해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에 정말 소중하고 값진 경험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때의 마음 잊지 않고 항상 열심히 살아갈게요. 건강하세요.”     


  그리고 혹시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험생 친구들이 있다면

나는 그래도 부모님께 받을 수 있는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빨리 합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처럼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만큼 꼭 합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반드시 어려움을 이겨내고 합격해서

스스로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길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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