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바람도 그 누구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
4박 5일의 일정으로 떠난 여름 휴가지는, 처음 머물러 보는 곳인, 강원도 양양이었다.
5일간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 햇볕 아래 힐링하고, 물에 들어가서 놀고... 할 예정이었다.
딸 방학식날, 하교하자마자 바로 떠났고, 도착해서는 나와 딸은 바로 수영복 갈아입고, (일이 있던 남편은 두고) 숙소 근처 양양의 하조대 해수욕장으로 걸어갔다.
드넓은 해변에 평일 오후 시간이라 적당한 정도의 사람들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바로 준비 운동하고 입수했다.
딸과 나는 물안경 쓰고 때로는 튜브를 들고, 튜브도 계속 뒤집어져서 맨몸으로 파도를 타고, 파도 아래를 헤엄치며 놀았다. 몇 년만의 바다인데, 이전에 바다로 갔을 때 보다 딸은 훌쩍 커서, 같이 파도타기를 하니, 이건 머 극강의 즐거움이라 말할 수밖에 없겠다.
파도타기가 이렇게 재밌다니...정말 너무 재밌어서 해수욕장 문 닫는 시간(?)까지 놀다가 돌아왔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비가 정말 많이 왔다. 그리고 바람도 엄청 불었다. 여...름 맞나? 싶을 정도로.
9시부터 해수욕장 문을 여는데, 오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근처 북까페에서 커피 마시고 책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건 또 그 시간대로 여유롭고 휴가 같아서 좋았지만, 점심을 먹고도 계속 비가 내리자, 똘끼가 발동-
우리는 10월 바다에도 입수한 사람들인데, 비가 와도 바람이 불고 그래서 여름날씨 같지 않아도 그냥 들어가 보자... 싶어서 딸과 작당모의 끝에, 또 주섬주섬 챙겨서 하조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이번에는 남편이 바로 돌아올지도 모르니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어제 적당이 북적였던 사람들은 해변에도 바다에도 없었다. 딸과 내가 바로 입수하자, 안전요원이 천막에서 나오셨다. 아무도 없어서 천막 안에 계시다가, 우리가 입수하니 일을 시작하신 것.
비 오는 바다, 그래서 더 높게 치는 파도 덕분에 더 재밌게 파도타기를 할 수 있었다.
비가 와서 허리까지만 입수하라는 안전요원의 지시가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파도를 쫓아가다 보니 안전요원의 휘파람 경고 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의 파도타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말 신기한 건, 우리가 빗속에서 신나게 놀고 있으니, 우산 쓰고 산책 나온 사람들, 비 오지만 놀러 온 거니까 한번 나와본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다로 들어와서 놀게 된 것이다.
처음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아무도 없는 바다에는 그 누구도 쉽게 들어가지 않지만, 한 두명만 들어가 있어도 용기가 생기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딸 화장실 데려다주면서 한번 나왔더니, 너무 추워서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너무너무 추웠다.
입술 파래지고, 손가락 끝 보라색 되고... 그렇다 나는 원래 추위를 극심하게나 타는 사람인데, 물속에 있을 땐 모르다가 물에서 나오니 추위가 더 느껴진 것이다.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그런 추위로, 나는 많이 놀지는 못하고 딸이 노는 거 지켜보다가,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다음 날은 또 비. 하하하.
휴가 5일 중 4일이 비가 왔다.
그러나 이 날은 전날보다는 비가 좀 덜 오고, 하늘의 99%가 먹구름으로 덮여있고, 가끔, 아~주 가끔 햇빛이 구름 사이로 살짝 비치곤 했었다. 나는 어제 추위를 무릅쓰고 일단 오전엔 나가서 해변에 앉아있고, 딸이랑 남편은 그 추위에도 비에도 신나게 파도타기를 했다. 그러다, 오후가 되니 조금 더 따듯한 기운이 올라와서 용기가 생겼고, 결국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또 신나게 파도타기를 했다. 와, 이건 인공파도와 비할 바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얼마나 클지 알 수 없는 파도를 기다리다가, 넘을 수 있겠다 싶은 건 넘어보고, 너무 큰 파도는 그 아래로 잠수하며 지나 보내는... 이 짜릿함이 너무 좋았다.
파도를 기다리는 그 시간들 자체가 정말 황홀했다.
다음 날도 흐렸다. 그런데 전날 파도타기를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남편이 몸살 기운이 있어서 숙소에서 쉬는 동안, 딸과 나는 양양 쏠비치 오션 플레이로 원정을 갔다. 이날도 바람이 많이 불고 흐렸기에, 내가 너무 추워한 게 안쓰러웠는지 딸이 좀 더 따듯한 곳으로 가자고 했다.
이 날, 시작은 오션 플레이였지만,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끼라고 해서 야외 수영장으로 갔다가, 거기서 보이는 프라이빗 비치로 나가서 놀게 되었다. 프라이빗 비치라 프라이빗 안전요원들이 아예 입수를 금지하고 있어서 해변에서만 놀아야 했다. 그래서 딸과 모래놀이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이야, 모래놀이가 또 왜 이렇게 재밌는 거지?
오후까지는 비가 오지는 않아 구름에 해가 가려 그늘이 없는 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모래놀이를 했다. 물길을 만들고, 물길에 파도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으며, 기다린 끝에 파도가 들어와 물길을 타고 나가는 모습까지 지켜보면서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딸은 비닐봉지에 바닷물을 공수해오는 수고로움까지... 재밌게 해내었다.
여행 전에 일기예보를 보면서 약간 의기소침하고 걱정을 했었다: Why God, why?! 왜 하필이면 내 휴가 때!!! 일주일 내내 비 소식인가요?!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이글거리는 햇빛이 내리쬐는 그런 여름휴가는 아니었지만, 용기와 약간의 똘끼가 갖춰진다면 빗 속에서도, 한여름 추위 속에서도 해변에서 즐길거리는 많았다.
다음 여행부터는 여행 중 날씨가 어떻든 별로 상관안 할 것 같다.
어떤 날씨에서도 재밌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