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로 Apr 24. 2023

희생양과 샤먼의 이야기, <스즈메의 문단속>

르네 지라르와 축의 시대로 보는 <문단속>의 세계관

*글 내용에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과 <미드소마>의 스포가 있다.


이전 글(https://brunch.co.kr/@ganro/126)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누군가를 희생시켜 사회전체를 지켜내는 사회. 그건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다신교 신화를 받아들이던 세계의 특징이다. 재난이나 분쟁 등 때문에 사회적 피로도나 긴장으로 사회 내의 갈등과 폭력성이 올라가 있는 상황을 사회는 무고하지만 보복의 가능성이 없는 대상에게 다수가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적 와해의 위기를 벗어나오는 메커니즘으로 사회를 보전해왔다고 한다.


지진이나 흉작 같은 재해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 사회적인 분노를 일부의 무고한 이를 희생시켜 그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구해왔다는 것이다. 일부가 화풀이처럼 폭력을 당하고나면 나머지는 이제 평화로이 사회를 보전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는 파르마코스라는 존재가 있었다. 폴리스에서는 자연재해나 기근 같은 재앙이있는 해에 노예나 범죄자 중에서 몇 명씩을 뽑아 들판에서 희생시키는 의식을 행했다. ‘파르마코스’는 이 같은 의식의 희생양으로서, 정화(淨化) 의식 전 한동안은 최상의 대접을 받았으나 이후 추방당하고 돌팔매질 당하며 때로는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파르마코스’는 밖으로 추방당하기 위해 비로소 안에 받아들여진 자, 안에도 밖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라르는 이걸 여러 신화적 세계관의 공동체 특징으로 설명한다. 한 예시로 드는게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와 관련된 신화 이야기다. 도시 에페소스에 페스트가 퍼지자 손쓸 도리가 없어진 사람들은 아폴로니우스에게 해결을 부탁한다. 그는 전염병을 퇴치하겠다며 극장으로 향하고서 그곳에 있던 넝마를 걸치고 장님처럼 눈을 깜빡이던 거지에게 돌을 던질 것을 사람들에게 종용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불쌍한 거지에게 연민을 느끼며 그러지 못하였는데 거듭된 종용에 몇몇이 실제로 돌을 던지자 깜빡거리기만 하던 이 거지의 눈이 이글거리며 날카롭게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에페소스의 사람들은 이 거지가 실은 악마라는 것을 알고서 수북히 쌓일 정도로 돌을 많이 던져 악령을 퇴치하였다. 이후 쓰러진 자를 다시 확인해보니 정말로 거대한 몸집의 짐승이었으며 이후 그 자리에 수호신 헤라클레스의 상을 세워 기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에 대해 지라르는 아폴로니우스가 한 것은 다만 복수의 가능성이 없는 사회적 약자를 제물로 삼아 앞서 말한 희생양 메커니즘을 작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희생양의 변형 작업인데 무고한 거지가 어느새 악령으로 바뀌어 서술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화는 희생양이 아니라 박해자의 텍스트이며 그 폭력의 메커니즘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희생양을 만드는 폭력의 정당화를 위해 무고한 거지는 악마로까지 변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로서 폭력행위의 진실은 은폐되며 박해를 통한 공동체 수호는 정당한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진실은 그가 복수를 행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로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일 뿐.


이런 사회가 어떠했을지 짐작해보기에 훌륭한 교보재가 영화에도 있다. <미드소마>다.

아아, 난 본게 아닐까. <미드소마>의 저 위대한 광경을 <문단속>에서도.

영화에서 플로렌스 퓨가 분한 주인공과 그 일행은 한 친구의 초대에 응하여 스웨덴의 어느 외딴 마을 공동체의 하지(夏至) 축제에 참여하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문화체험 정도로만 인식했으나 실상은 재해나 흉작이라는 재앙으로부터 세상의 풍요를 보존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제의였고, 주인공 일행은 희생될 외부자들로서 초대된 것이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인류학 교보재가 아닌가 싶을정도로 생생하게 신화적 사회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렇게 희생양을 정당화하던 다신교적 신화의 텍스트는 서구에서는 기독교가 보편화되면서 복음서로 대체되어 갔다고 한다. 

지라르는 복음서는 정반대로 희생양의 관점에서 이런 다신교 신화적 사회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고 평한다. 그가 예시로 드는건 요한복음의 한 일화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는 여인을 예수 앞에 데리고 와 모세는 율법에 따라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물으니 예수는 너희 중 죄 없는 이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 하였다. 그러자 모여있던 군중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한둘씩 자리를 떠나더니 결국 그곳에는 예수와 그 여자만 남았고 예수는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였다는 이야기.


앞서의 신화에서 아폴로니우스는 거지를 악마로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이 폭력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나 예수는 도리어 폭력적 상황을 비폭력으로 바꾸고 있다고 지라르는 평한다. 신화에서 비난은 희생양을 향하나 복음서에서 비난은 도리어 박해자들을 향하며 이로써 집단적 폭력의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되는 수난을 이야기할 때에도 드러나는데, 이런 사건이 철저히 박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신화와 달리 그런 폭력적 상황이 희생양의 입장에서 서술되며 그 무고함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희생양의 죄가 아니라 누명이 도리어 드러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시대의 부침은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서구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이런 희생양 구도가 전복되는 방향으로 변해왔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근대 이래의 인권개념도 신앞의 평등이란 개념과 무관하지 않을테니. 참고로 필자는 종교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여기에 비견될만한게 무얼까. 유교아닐까. 


놀랍게도 동아시아에서도 비슷한 구도의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공자의 제자인 자하에게서 학문을 배운 중국 전국시대 사람인 서문표의 예를 들 수 있겠다. <사기>의 열전에도 나온다.


그가 업성에 지방관으로 왔을 때의 일이다. 성안에 사람이 없고 왕래가 적으며 민심 또한 좋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하던 차에 알아보니 지방의 하급관리들과 아전들이 홍수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주기적으로 젊은 여자를 뽑아 하백(강의 신)에게 신부로 바친다며 강물에 희생시키는데, 이때 백성들로부터도 세금을 거두고 무당들과도 돈을 나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그동안 홍수가 없고 가뭄만 발생하곤 해서 이런 일이 정당화되어왔다는 것도.

이에 서문표는 신부를 바치는 날 본인도 참석하기로 한다. 당일날 그는 바쳐지기로 한 처녀가 아름답지 않다며 하백에게 다시 예쁜 처자를 구해다 드리겠다고 전하라며 큰 무당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윽고 무당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재촉해 오라며 무당의 제자들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같은 방식으로 지방관리들도 마찬가지로

강물에 던졌다. 이윽고 아전들에게도 그리하려 하니 그들이 머리를 땅에 찧으며 목숨을 살려달라 애원하였다. 

이후 서문표는 도랑을 파서 강의 물을 끌어 백성들의 논에 물을 대게 하여 가뭄을 해결하였다. 또한 그동안 이런 제의로 이익을 본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되돌려주고 무당들을 혼인시켜 무속을 뿌리뽑아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게 하지 않았다 한다. 


자연적 현상인 재해를 괴력난신의 행태로 설명하는 것도 다신교적 세계관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런 재해를 희생양을 바쳐 방지한다고 여기는 것도. 서문표는 그런 세계관을 보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다른 세계관으로 대체한다. 이제 홍수는 하백이라는 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물은 인간의 힘으로 다스려질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가족이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던 무당을 혼인으로 다시금 가족 공동체 체계 내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백성을 위해 무속을 통해 부당하게 빼앗긴 이득을 되돌려주며 도랑을 파 가뭄을 해결해준다.


실제로 유교의 보편화과정은 이런 다신교적 무속의 세계관을 몰아내는 과정도 포괄한다. 그와 함께 희생양 제의에 대해서도 원리상 유교는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중국에서 유력자가 죽으면 살아있던 사람들도 함께 묻는 순장이 청나라 때까지 꽤 오랜동안 행해졌지만 유학자들은 원리상 매번 그런 제의를 비난하지 않았던가. 중국과 같은 수준으로 유교 원리가 사회의 기저에까지 침투했다고 평가받는 한국에서는 도리어 중국보다 훨씬 빨리 순장이 사라진다. 



다신교적 세계관의 희생제의를 비판한게 기독교, 유교의 일정한 역할이었다면 일본은 어떠했는가. 


일본은 같은 동아시아 문명권이라 쉬이 묶이면서도 의외로 찬찬히 따져보면 온전히 유교가 사회저변에까지 침투한 적은 없는 사회다. 일본사회의 지배적 종교라 들만한건 신토와 불교까지지 유교는 전혀 아니다. 에도시대 극히 일부의 사무라이 가문들이 성리학을 공부했던 것, 그게 일본사회에 유교가 받아들여진 최대지점이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들어온 것도 아니다. 에도 시대때 일부 사회취약층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퍼지기도 했으나 곧 강력한 탄압 앞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카톨릭이 지배적 문화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스콜세지의 <사일런스>는 그때를 다룬 영화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사일런스>


기독교나 유교의 특징은 세계를 도덕적 차원에서 해명한다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타당한 보편적 원리가 있으며 사회적 도덕과 윤리도 그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정당화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이런 논리상 사회적 규범이 그런 보편적 원리와 배치된다면 비판도 가능해진다.) 불교도 업보/카르마 개념에서 이런 특징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시대는 어떻게 세계를 해명하는가? 신화적 사회는 다양한 신이 자연현상을 주관하며 특정한 인간에게 권능을 주거나 은덕과 저주를 내린다. 그래서 이때의 권력자들은 자신을 신의 후손이라거나 신의 은덕이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했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유력자들이 자신을 신의 자손이라고 한건 이유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은 그저 차원이 다르게 힘이 강한 존재들이지 도덕적으로 옳거나 초월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초월적 신 개념을 아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많은 신들은 선뜻 신으로 부르기에 부족하게 느껴지는게 다 이유가 있다. 그들은 전혀 도덕적 원리를 제공해주지 않으며 그저 힘만 세며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변덕스럽게 인간의 운명을 바꿔대는 존재들일뿐이다.(<문단속>의 다이진도 얼마나 변덕스럽던가!)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런 신화적 세계에서 도덕적/초월적 원리의 세계로의 전환이 일어난 시기를 가리켜 '축의 시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유라시아의 주요문명권에서 이후에도 지배적 조류가 되는 철학, 종교 사상이 등장한 시기다. 중국의 공자, 인도의 석가모니,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의 시대라고 하면 이해가 될지.


이렇게 보면, 일본사회는 상당기간 축의 시대 이전의 사회였던 셈이다. https://slownews.kr/75843

일본에는 극히 최근까지도 여러 신'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그 신들은 초월적/도덕적 차원의 존재가 전혀 아니다. 신들로 자연현상을 가리키는 신토의 신앙체계는 축의 시대 이후의 관점에서 보면 원시신앙에 더 가깝다. 

그리고 여러 신들과 소통한다 하는 샤먼도 여전하다. 신사에 있기도 하는 신직이나 무녀같은 것도 여기에 비길만한데, 그게 <문단속>에서는 사토로 대변되는 토지시일테고. 


여기까지 보고나면 <문단속>의 세계관도 이런 축의 시대 이전 신화적 세계관과 꽤 많이 겹쳐보인다. 그곳도 자연현상이 '신들'로서 나타나는 세계다. 그리고 그런 자연현상인 재앙을 재앙신 미미즈로 바라보며 이를 억제하는 희생양 구조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다음 글로 계속)

https://brunch.co.kr/@ganro/129



#스즈메의문단속 #영화 #애니메이션 #일본 #축의시대 #희생양 #르네지라르 #기독교 #복음서 #유교 #신화 #다신교 #미드소마 #사일런스 #침묵 #엔도슈사쿠 #아리에스터 #마틴스콜세지




이 글은 다음의 문헌들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읽기에 수고가 더 요구되는 순서대로 나열했다. 


르네 지라르, <희생양>, 민음사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문학과 지성사

김모세, <르네 지라르>, 살림

요나하 준, <중국화하는 일본>, 페이퍼로드

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민음사

임명묵, <일본인들이 '태양 너머'를 상상하게 되었을 때>(슬로우뉴스, https://slownews.kr/75843)

매거진의 이전글 <스즈메의 문단속> 혹은 다이진의 침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