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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Apr 21. 2024

아이의 덕질을 위하여

아이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에그박사 뮤지컬을 보고 왔다. 어린이집을 빠지고 가야 하니 여간해선 평일에 놀러 가는 일정을 잡지 않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손가락을 삐끗해 정형외과에 가야 하는 수요일, 오전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 2시 공연을 보기로 했다.


에그박사는 ‘재미있는 자연생물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튜브 채널’로 에그박사, 웅박사, 양박사 셋이 모여 만든다. 아이를 키우는 집이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곤충을 좋아하는 우리 집 어린이는 에그박사를 매우 애정한다. <에그박사> 책 12권을 모두 소장하고 있고, 한글도 이 책으로 스스로 뗐다.      


좋아하니까 책을 사주긴 했는데 아무리 만화책이어도 글이 길었다. 처음에만 읽어주다가 나중엔 귀찮아서 “그냥 그림만 봐도 돼” 하고 도망 다녔다. ‘사사삭’ ‘두다다다’ ‘오오’ 정도만 간신히 읽던 아이는 매정한 어미를 둔 탓에 혼자 떠듬떠듬 한 글자씩 읽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책을 술술 읽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책을 읽고 한글을 떼다니!(이것이 내가 에그박사 책을 계속 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마워요, 에그박사!)


안경을 쓸 때도 도움받았다. 아이는 약시와 난시가 있어 시력 교정을 위해 안경을 쓴다. 눈 나쁜 부모를 둔 탓에 어린 나이에 안경을 쓰는가 싶어 마음이 안 좋았다. 반면 아이는 안경 쓴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에그박사 같다며 좋아했다. 자기도 에그박사가 되고 싶다기에 에그박사는 이미 있으니 ‘애교박사’는 어떠냐니까 싫단다. 똑같은 이름은 상도가 없으니 우리 집 한정 ‘에그박사’로 합의를 봤다.


에그박사에 폭 빠진 아이는 “엄마, 죽기 전에 에그박사를 한 번은 볼 수 있을까?”라며 처량히 말하기도 했다. 흡사 <마지막 잎새>를 보는 듯했다. 부지런하지 못한 나는 에그박사 관련 정보를 늦게 알아챈 탓에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내 귀에 들어온 때는 행사가 이미 끝난 뒤였다.


그러다 운 좋게 에그박사 뮤지컬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지어 에그박사, 웅박사, 양박사 세 명이 직접 출연한다고 한다. 티켓 값이 만만치 않지만 지난번에 형님이 아이에게 주신 용돈이 있으니 그 돈을 쓰면 되고, 어린이집은 특별한 날이니 하루 빠지면 되고. 그렇다면 안 되는 건 운전뿐이구나. 강남 고속터미널에 이어 또다시 자괴감이 밀려왔다. 서울 시내는 가본 적이 없는데 어쩌지…


남편에게 넌지시 주말에 셋이 갈까, 물었지만 반응이 시원찮다. 어차피 셋이 가도 티켓 값이 비싸 둘만 들어가야 한다. 누구 하나는 밖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밖에서 커피 마시며 호젓하게 대기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했다. 허나 남편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편은 우아하게 커피 마시는 사람을 자기로 설정했다. 부부 사이에 동상이몽이 이런 거구나.


그럴 바엔 굳이 주말까지 기다릴 것 없이 오늘 아이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평일에는 공연 끝나고 포토 타임도 있다고 한다. 오후 2시 표를 예매했다. 공연 당일은 환불도 안 되므로 무조건 가는 거다.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마음을 다잡는다. 기름 가득 채우고, 시간 넉넉히 잡고 가면 되겠지. 운전 스트레스는 여전히 심하지만 그래도 왕초보 시절보다는 아주 조금여유가 생겼다. 모든 길은 이어져 있기 마련이다. 오늘 안에는 어떻게 되겠지, 뭐.


출발 전 마트에 들러 졸음방지 캔디를 하나 사고, 아이 간식으로 이것저것 챙겼다. 운전 중에 아이가 날 찾지 않게끔 아이 손이 닿는 곳에 간식과 물, 물티슈를 세팅했다. 출발하자마자 아이는 뒷자리에서 열심히 간식을 까먹으며 질문을 쏟아냈다.


“진짜 에그박사가 와?”

“응.”     


“얼마나 걸려?”

“한 시간 좀 넘게?”     


“엄마 운전하는 동안은 대답 못해도 이해해 줘.”     


양해를 구한 뒤 아이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고, 적당히 뭉갰다. 미니 약과, 말랑카우, 초유 성분이 들어 있다는 우유 캔디, 해피 히포 등 여러 간식이 아이 입으로 사라졌다. 아유,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웅얼거리며 아이는 한 움큼씩 먹어댔다.      


한 시간여를 달려 12시 20분쯤 이화여대에 도착했다. 새우튀김 우동과 왕돈가스를 먹고 전시된 곤충을 구경하다 보니 금세 입장시간이 됐다. 실제로 본 뮤지컬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신나고 재미있었다. 평소 유튜브를 찍어서 그런지 에그박사, 양박사, 웅박사 모두 연기가 자연스럽고 발성이 좋았다. 객석을 돌며 관객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공연이 끝난 뒤 기념사진도 찍었다. 공연 중간중간 살펴본 아이 얼굴은 그저 황홀해 보였다. “엄마, 벌써 끝나는 거 아니지?“ 공연이 끝날까 봐 마음을 졸이긴 했지만.


공연 중간에 주어진 포토 타임


신나는 시간을 보낸 뒤 한껏 상기된 아이와 차로 돌아왔다. 주차장에서 양평 집으로 가는 길을 찍으니 올 때와 똑같은 경로를 알려줬다. 한 번 왔으니 갈 때는 쉽지, 음하하하 하며 출구로 나왔다. 하지만 후문을 통과하자 내비게이션은 다른 경로로 날 이끌었다. 아니, 이 배신자! 아까랑 길이 다르잖아! 주차장에서 모의주행까지 하고 나왔는데!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타고 온 것과 달리 이번에는 북악터널을 지나 내부순환로와 북부간선로를 지나는 경로였다. 다행히 예전에 남편과 이 길을 지난 기억이 났다. 아이는 공연을 본 후 도파민이 폭발했는지 에그박사 모자를 쓴 채 깊이 잠들었다.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이었으면 기약 없이 미뤘을 텐데 자식이 뭐라고. 괜히 웃음이 났다.


기념품으로 산 에그박사 모자


그래도 아이 덕분에 서울 시내에 처음으로 운전해서 왔다. 갈 수 있는 곳이 하나 늘어 기쁘고, 아이의 덕질을 함께할 수 있어 뿌듯하다. 오늘 다시금 생각한다.


운전을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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