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일원동에 있는 삼성병원에 갈 때 혼자 버스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오기가 힘들어졌다. 원래는 아빠가 엄마를 버스 타는 곳으로 데려다주고 엄마가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다. 두 시간 뒤 버스가 도착하면 내가 마중 나와 있다가 버스가 내리는 곳에서 엄마를 만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엄마를 두 시간 동안 혼자 둘 수 없게 됐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엄마의 병원 예약 전날, 내가 본가에 내려가 하루 자고 다음 날 새벽 엄마와 병원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양평 우리 집에서 본가나 병원으로 바로 간 적은 있지만 본가에서 병원으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며칠 전부터 긴장됐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각조각 난 루트를 이어 붙이면 도착지와 목적지 모두 내가 가본 곳이므로.
전날 오후, 집에서 출발했다. 당일 아이 하원과 다음 날 등원은 남편이 시키기로 했다. 지난번에 갔던 길과 내비게이션이 조금 다르게 안내한 것 같은데(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네) 큰 무리 없이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 같이 저녁을 먹고 근처에 사는 언니와 조카도 봤다.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해야 하니 미리 짐을 챙겨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엄마는 채혈을 위해 공복을 유지해야 해서 아침을 걸렀고, 나는 어제 사놓은 빵을 반 잘라 먹고 나머지는 식탁에 두었다. 아빠의 배웅을 받으며 필요한 것들을 챙겨 엄마와 집 나설 채비를 했다. 하루 동안 모은 소변이 들어 있는 통, 신분증, 여벌 옷 등등.
아빠에게 인사를 하고 엄마와 둘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출입문 가까이 주차한 덕에 몇 발자국만 떼면 됐다. 눈이 침침한 엄마가 주차 턱에 넘어질까 봐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엄마와 내 짐을 조수석에 싣고 뒷좌석 문을 열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뒤에 타.”
엄마는 잠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엄마의 표정을 읽은 나는 우물거리며 몇 마디 덧붙였다. “조수석에 가방을 둬서. 그리고 뒤가 더 편하지 않아?” 엄마에게 뒷자리에선 다리를 쭉 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수석 의자를 바짝 당겨서 공간을 넓혀둔 터였다. 그래도 엄마는 서운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딸이랑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가는 게 좋지.”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맞았다. 궁색한 변명은 그만두고 조수석 가방을 치웠다. 엄마는 만족한 얼굴로 앞자리에 앉았다.
조수석을 바짝 당겨 뒷자리를 넓혀 놓았다지만 키 150이 안 되는 엄마에게 득이 되는 조건은 아니다. 의자를 당기지 않아도 키 작은 엄마에겐 이미 넉넉하기에. 뒷자리가 상석이라 엄마에게 뒤에 앉으라 권한 것도 아니다.
솔직한 내 심정은 서울까지 가는 동안 좀 조용히 가고 싶었다. 점점 짧아지는 기억력 탓에 엄마는 조금 전 일도 자꾸 까먹고 계속 되묻는다. 아침 약을 먹고 돌아서면 까먹어서 또 먹기도 하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한다. 처음엔 엄마의 말에 대답을 다 해주다가 나중엔 지쳐서 뚱하게 대답했다. 엄마가 거실 소파에 있으면 난 아예 부엌 식탁에 앉아 있는 등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다.
언젠가 남편은 이런 나를 보고 “너 정말 못됐다”라고 말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반나절을 버티기 힘들다. 또 자꾸 과거 일을 말하는데 대부분이 안 좋은 이야기, 또는 남 이야기다. 좋은 이야기만 계속해도 질릴 마당에 과거의 안 좋았던 일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내 기분까지 점점 안 좋아진다.
병원에 가려면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엄마와 단 둘이 있는 밀폐된 공간에서 내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운전까지 해야 하는데! 그래서 갖은 핑계를 대며 엄마에게 뒤에 앉으라고 한 것이다.
내 계획은 무산됐고, 예상대로 나는 두 시간 동안 엄마의 이야기를 쉬지 않고 들으며 운전했다. 열두 시간 공복을 유지해야 해서 그 시간 동안 물 한 모금도 안 먹은 엄마가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는지 모르겠다. 다만 엄마의 기분이 좋아 보여 나도 크게 말리지 않았다. 가끔 분기점이나 중요한 길목에서는 내비게이션을 듣기 위해 엄마를 제지했다. “엄마, 조용히 해 봐. 내비게이션이 안 들리잖아.” 그럼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미안해했다. “아유, 그러냐.” 민망한 순간이면 애꿎은 안전벨트를 매만졌다.
출근 시간에 걸려 조금 지체됐지만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엄마, 다 왔어. 이제 내리자.” 긴장이 풀려 그제야 엄마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할 수 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못다 한 말이 있어 보였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 엄마를 부축하려 팔짱을 낀 내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막내딸, 고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