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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Aug 16. 2024

좌회전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초보에게 고통을 주는 신호 중 하나는 비보호 좌회전일 것이다. 비보호 좌회전은 직진 신호에 초록불이 들어온 뒤, 반대편에서 차가 안 올 때 한해서 좌회전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보호이므로 규정을 어겨 사고가 날 경우 내 과실이다. 고로 신중히, 전방을 잘 살펴 내가 갈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야 한다.


면허를 딴 뒤 운전 연수를 받을 때도 선생님이 비보호 좌회전은 특히 조심하라고 하셨다. 정지 신호에 가면 신호위반이 되어 벌금과 벌점을 부과받으니 뒤에서 암만 빵빵대도 당황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인터넷의 초보운전 카페에도 비보호 좌회전은 자주 언급된다. 자기는 기다리려고 했는데 뒤차가 너무 경적을 울려서 못 이기고 빨간 신호에 지나갔다는 글, 초록불에 비보호 좌회전하려는데 맞은편에서 계속 차가 오는 바람에 한 신호가 끝나도록 좌회전을 못 했다는 푸념도 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비보호 좌회전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첫째, 반대편 차선을 잘 보고 신중하게 하자.

둘째, 빨간 불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 무조건 초록불에만 가능하다. 뒤차가 아무리 빵빵대도 무시하고 기다리자. 괜히 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뒤차가 책임져주지 않는다. 결과는 모두 내 책임이다.     


잔뜩 긴장하며 다짐했지만 우리 동네에 비보호 좌회전이 쓰여 있는 곳은 찾지 못했다. 옆 동네 도서관이 좌회전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이곳은 비보호가 아니고 좌회전 신호가 있는 곳이었다. 동네만 주로 다니다 보니 한동안 비보호 좌회전을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 가기 위해 좌회전 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뒤차가 ‘빵’하고 경적을 울렸다. ‘뭐지? 지금 직진 신호인데. 좌회전은 직진 끝나고인데.’ 뒤차 역시 나와 같이 좌회전 깜빡이를 켠 상태였다. 뒤차는 다시 ‘빵빵’하며 처음보다 더욱 긴 경적을 울렸다. 반대편 차선에서 차가 안 오긴 했지만 엄연히 직진 신호였다. 순간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꾹 참았다.      


다시 경적을 울리길래 백미러로 보니 뒤차의 운전자는 거의 공중 부양을 하며 빵빵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직진 신호가 끝나고 좌회전 신호가 들어온 뒤에야 차를 움직였다. 뒤차 운전자를 향해 ‘성질 참 급하시네’ 하고 혀를 차며. 신호가 바뀌자 뒤차는 붕 소리를 내며 쌩하니 지나갔다.      


볼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로드뷰를 켰다. 신호등과 표지판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서다. 사실 아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도서관 앞 신호등에는 '직진 후 좌회전'이라는 설명이 적힌 표지판이 있고, 좌회전 신호가 따로 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다시 '비보호' 표시가 있고, '녹색 신호 시 좌회전 가능'이라고 써 있었다. 뭔가 놓친 부분이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까 거기가 비보호 좌회전 구간이었나? 하지만 신호등이 4개였는데? 내가 알기로 비보호 좌회전은 신호등이 3개인 곳, 즉 좌회전 신호는 없고 직진에 대한 초록불, 노란불, 빨간불만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 보니 내 생각과 달리 비보호 좌회전은 신호가 4개인 곳에도 있었다. 좌회전 신호가 따로 있지만 이곳에서는 직진 신호일 때도 비보호 좌회전을 할 수 있었다. '비보호 겸용 좌회전'이라고 하는데 도서관 앞이 그 경우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꼿꼿하게 버티던 아까의 내가 부끄러워 괜히 툴툴거렸다. ‘좌회전 신호가 있는데 비보호는 왜 추가한 거야. 그냥 다 좌회전 신호에 가면 되잖아. 사람 헷갈리게.’ 하지만 이유가 있었다. ‘비보호 겸용 좌회전’은 비보호 좌회전과 보호 좌회전의 장점을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차량 소통이 더 원활해지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진실을 알수록 공중 부양을 하던 뒤차의 운전자가 생각나 한없이 미안해졌다. 괜히 나 때문에 시간 버리고, 에너지를 쏟으신 그분.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누구신지 몰라 사과의 말을 전할 길이 없지만 이렇게라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울러 선생님 덕분에 제가 또 하나를 배워갑니다, 는 반성의 말도.     


그 뒤로 도서관에 갈 때면 나는 '보호 좌회전'을 할까, '비보호 좌회전'을 할까? 정답은 둘 다 아니다. 다른 길로 간다. 더 가까운 뒷길이 새로 뚫려서 우회전으로 들어가는 길로 다닌다. 비보호 좌회전 따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도 가끔 도서관 앞을 지날 때면 ‘비보호 좌회전’ 표지판을 보며 지난날의 내 과오가 떠올라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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