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프로그램 to 프로그래밍
나는 고등학생 때 문과를 선택했다. 지금은 IT 회사에서 개발을 하고 있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있었던 고민과 일을 몇 편의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나는 TV 프로그램을 너무 좋아해서 PD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고민해 만들어 낸다는 점,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사회적으로 적당히 알아주면서도 일정 수준의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온다는 점도 물론 고려사항이었다.
PD가 되기 위해 대학생 때 특별히 해야 할 것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특정한 스펙을 쌓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남들은 진로를 탐색하고 준비하며 바쁘게 사는 동안 나는 PD를 지망한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그저 흘러갔다.
당시에도 문과를 졸업하면 취업이 어렵다는 말이 있어서 많은 문과 학생들이 상경계를 이중전공했다. 그게 문과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책으로 여겨졌다. 나는 아주 쿨하게 이 전략을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선구안이 있었던 선배 한 분이 컴퓨터공학을 이중전공하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나를 포함한 여러 신입생들의 반응은 "굳이 왜?"였다. 지금이야 많은 문과생들이 컴퓨터공학에 도전한다고들 하는데, 그때만 해도 컴퓨터공학을 이중전공한다는 건 예체능을 이중전공한다는 것만큼 뜬금없고 무모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졸업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왔고, 막상 사회에 발을 내딛는 것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자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진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향적인 편인 내가 방송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의 체력이 방송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저녁이나 주말 없는 삶을 흔쾌히 대가로 지불할 만큼 자아실현의 기쁨이 있을까? TV가 예전만큼의 영향력이 없는데도 왜 나는 TV 방송국 소속의 PD만을 고집하는가? 컨텐츠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정말 진심인가?
그러나 바꾸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고, 의구심이 있는 채로 나는 PD 채용을 준비했다. PD도 일반적인 기업과 마찬가지로 서류, 필기(상식 및 작문) 시험, 면접으로 진행된다. 서류는 (다른 일반 기업의 서류 전형과 비교했을 때) 많이 합격시키고, 필기 시험에서 대부분을 떨어뜨린다. 한두 명만 뽑는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20 대 1 정도가 된다.
나는 두 차례의 면접 기회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면접관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내 길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왜 하고 싶은지를 집요하게 물어보는데 나조차도 나를 설득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남을 설득하는 것은 무리였다. 솔직히 '꼭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면접을 더 본다고 붙을 것 같지가 않았다.
뒤늦게 다른 길을 모색해보려고 했다. 취업 공고를 보니 내가 지원할 수 있으면 재미가 없어 보였고, 재미가 있어 보이면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았다. 대학교 수업으로 서비스 기획 비슷한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 막연히 IT 회사의 기획 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일단 공고 자체도 별로 없거니와 있다 해도 경력직 공고였다. 이 쪽으로 가려면 지금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길을 다져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기업에서 제공하는 취업 연계 개발 교육 과정 공고를 보게 되었다. 굉장히 지쳐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개발자가 되는 게 더 빠를지도?"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하였다. 즉흥적으로 지원한 것에 가까웠고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전혀 없었는데 막상 붙고 나니 두려웠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분야인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호기로운 생각으로 도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