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입큰엄마 Sep 03. 2020

내 손에게 넌지시 건네는 말



어렸을 적 컴컴한 동굴서 코딱지를 꺼내 주고
땀에 젖어 가려운 머리를 박박 긁어 주기도 하고
논두렁 흙더미 속을 범벅이 되도록 휘젓기도 하고
유난히 철봉 매달리기 좋아해 얇디얇은 살이 벗겨지고 피가 나는 건 다반사였지.
결국 굳은 살은 훈장처럼 자리를 잡고 천방지축 말썽쟁이 주인 만나 크고 작은 고난 속에도 무던히 너의 일들을 해내 주었어.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그림자가 되어 내 눈을 감싸주기도 하고
비가 올 때  우산 밖으로 빼꼼히 나와 세상 촉촉함을 한껏 맛보고
눈이 올 땐 방방 뛰어다니는 나를 위해 허공 속 휘날리는 눈송이를 잡으려 애써주었지.
별  관심이 없던 피아노를 칠 땐 그렇게도 버벅거리더니
재미난 컴퓨터를 배울 땐 자판을 미끄러지듯 날아다니던 너였어.


할머니가 부르면 쏜살 같이 달려와서 작고 굽은 등을 조심조심 굵어 주기도 하고
아버지 일 손 도와드린다며 둑길 풀더미 속 휘휘 저으며 온 힘을 쏟기도 했지.
그러고 있노라면 '고사리 손 다친다!' 하며 너를 호호 불어 주시던  아버지 셨어.


처음 첫사랑의 손이 살짝 스쳤을 때 그 풋풋한 설렘이 희미해질 때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 준다며 너를 빌미로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는 남편도 만났지.
내 생애 처음으로 자식을 얻고 만졌던 천사의 손
너를 통해 느낀 그 떨림의 전율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나이란 걸 먹어가니
찬물과 뜨거운 물속에 철벅철벅 오가는 건 흔한 일이 되었고
축축한 행주도 더러운 걸레도 가릴 것 없이 거두게 되었지.
그렇게 살다 보니 땀과 먼지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차분히 정리해 주었던 것도 너였고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인생이 힘들고 외로워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제일 먼저 닦아 준 것도 너였어.


친정서 나오는 길 꼭 잡은 주름진 엄마의 손
봄처럼 따뜻한 온기는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고
저만치 가는 내 뒷모습에 따라와 꼬깃한 돈 몇 장을 너에게 쥐어주던 그 애틋함은 아직도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어.


난 오늘도 너를 살짝  포개고 기도를 한다.
앞으로도 거쳐갈 인생 속 무수히 많은 일들을
이왕 살아가는 거 조금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곳에 너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그동안 힘들었지? 고마웠어.
앞으로도 우리 잘해보자. 사랑해! 내 손.

작가의 이전글 울보 아빠와 운동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