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아빠와 운동화

by 입큰엄마


안녕하세요. 저는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주변에서 흔히들 하는 질문은

"1남4녀 중 혹시 아들이 막내인가요?"

라는 것이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 5남매 집에 둘째면 가운데 끼어서 눈치보기 바빳겠다고 지레 짐작들을 합니다.

그럼 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부모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해 주셨다고요. 고된 농삿일과 대식구 살림에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자식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부모로써의 책임를 다 하려고 노력하셨다고 말입니다.

물론 온전히 부모님의 사랑을 차지하지 못해 서운한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섭섭한 마음이 스물스물 올라오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건 33년전 아빠와 저에게 있었던 한가지 일때문입니다.

그 일은 제가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이 힘들고 직장업무에 지칠때도 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 같은 신기한 에너지를 줍니다.

그동안 저의 마음속에 간직해오던 그 보물보따리를 한번 풀어보려 합니다.



때는 1991년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그 당시 아빠는 매주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셨습니다. 그곳엔 엄마와 동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딸 넷 집안에서 보물 같은 아들로 태어난 영신이는 생후 6개월쯤 기침과 고열로 읍내 병원에 갔습니다. 심장 박동이 이상하다며 의사 선생님은 서둘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빠, 엄마는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옆 동네 택시 아저씨를 불러 큰 병원에 가셨고 금방 올 것 같았던 영신이는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심장병이라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이상이 생겨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 아버지는 평일에는 농사일을 하시고 주말이 되면 항상 서울 병원에 가셨습니다.

영신이가 빨리 나아서 우리 식구가 전처럼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게 해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수술만 잘 끝나면 금방 올 수 있다는 아빠의 말이 무색하게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영신이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사이 학교에선 가을운동회가 열렸습니다. 김밥을 싸 본 적이 없는 할머니는 찬합에 뽀얀 찹쌀밥과 삶은 달걀을 싸오셔서 나와 동생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고 늦은 저녁 밥상에서 손등 위에 희미하게 남겨진 1등 도장을 보이며 나는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아빠. 오늘 달리기 1등 했어! 다음 주에 학교 대표로 달리기 대회 나가는 거 알지? 운동화 옆구리가 또 터졌어! 할머니가 꼬매도 이젠 소용없다고. 이번엔 꼭 사야 돼. 선생님이 사라고 했어.”

살짝 거짓말을 덧붙였습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분명히 사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려. 운동회도 못가보고.... 이번 주말에 하나 사 올게.”

서울서 파는 운동화가 내 발에 온다니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신발을 본 친구들의 반응을 상상하니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밤잠이 잘 오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약속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좀 놀다 가자는 동생의 고함소리가 들리지만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곳곳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다 나온 할머니는 허리를 구부린 채 천천히 문지방을 건너며 나오셨습니다.

"할머니! 아빠 왔어?"

“이. 아까 전화 왔는디 8시 막차 타고 건너온댜.”


아빠가 서울에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며 학교에서 번개같이 날아 왔건만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았습니다.
“벌써 나가는겨?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어.”
마당 한편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신발을 질질 끌고 나오는 나를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중천에 있던 해는 슬금슬금 산 중턱 쪽으로 옮겨 가더니 점점 홍시처럼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저 멀리에서 노란색 버스가 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손님이 내리자 버스는 바쁘다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가버렸습니다.
“어?”
이상합니다. 아빠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이번 차가 막차입니다.
갑자기 머리가 하예져 일단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봅니다. 흙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어 바지가 더러워질 것 같지만 다리 힘이 풀려 일단 앉아야 했습니다. 버스가 온 쪽을 뚷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는 순간 저 멀리서 까맣게 누군가가 걸어옵니다. 빨간 석양을 등에 짊어지고 긴 그림자를 늘어트린 사람은 바로 아빠였습니다. 제때 내리지 못했나 봅니다. 턱벅터벅 걸어오는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습니다. 너무 멀리 있어서 안 보 일수 있다는 생각에 점점 가까워지는 그림자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어떻게 된 거야? 운동화는?”
한참을 멍하니 있던 아빠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어쩌냐. 깜빡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에 귓불이 후끈거리며 코 끝이 시큼거려 도저히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서울 도착해서도 단단히 기억 해뒀는디...병원 나오면서 까맣게 잃어버렸어... 어쩌냐... 이.... 아비가 되가지고. 딸내미가 달리기를 잘해서 대회 나간다는디... 신발 하나 사달라는디 그거 하나 못해주고.... 약속도 못 지키고... 나라는 인간은 부모 자격도 없다... 미안하다.. 미안혀.”
아빠는 무릎을 땅에 붙인채 낮은 자세로 내 눈을 맞추며 말했습니다. 주름진 눈 속에 물이 가득 차 반짝거렸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지 서둘러 고개를 숙이셨지만 나의 낡은 운동화 위로 무언가가 연신 툭툭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울어야할 사람이 바뀐 것 같아 어리둥절했지만 내손은 이미 아빠의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옷이 축축한걸 보니 오늘 하루가 녹록치 않았나 봅니다.

그때 내 나이는 10살. 어린 나이였지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빠가 온몸으로 울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까먹을 수도 있지. 그만 울어.,.뚝!."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왜 아빠가 그날 울보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딸과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잃은것 처럼 통곡하며 울수 밖에 없었는지. 그 날은 동생 영신이가 서울 병원서 ‘다운증후군’이라는 판정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심장병 수술만 잘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수술만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병실 아기들이 차례로 수술을 받고 퇴원을 하는 동안 동생은 고열과 폐렴이 반복돼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정밀 검사를 진행하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처음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염색체 이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김새도 조금 다르고 운동신경, 정신연령 등이 보통 아이들에 비해 뒤쳐질 거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 당시 부모님은 아이를 낳기 전 초음파로 미리 검사를 받고 할 여력이 없어 이러한 사실을 출산전에 몰랐다고 합니다.


갑작스레 닥친 어린 자식의 장애는 아빠에겐 가파른 절벽을 맞닥트린 것처럼 큰 일이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겁니다. 병원에서 돌아온 영신이는 두 돌이 다 되어서 걷기 시작했고 우리와 같은 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왕복 2시간이 걸리는 특수학교라는 아주 특별한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병원 진료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항상 영신이 일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한 달, 두 달이 되어가며 서서히 알게 됐습니다. 우리 가족에겐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운동화 끈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영신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나들의 따뜻한 품으로 감싸주니 그 끈은 더욱 견고해지고 단단해졌습니다. 나에겐 아직도 영신이는 천사 같습니다. 그건 30년 전 보았던 아빠의 눈물이 아직도 마음속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 내 손을 잡고 울보처럼 엉엉 울던 날 알았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가족을 얼마나 굳건히 지키고 싶었는지. 그날 이후로 아빠의 운동화 끈은 더 단단해졌고 우리는 그런 당신의 뒤를 열심히 따르고 있습니다. 힘드시면 이제는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이제는 저희가 당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드릴게요. 아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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