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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썬이 Dec 28. 2022

빵형 인간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케이크형 인간을 동경하며

나는 베이킹을 하는 사람들을 빵형 인간과 케이크형 인간,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빵형 인간은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 등을 주 재료로 하는 발효빵을 즐겨 만드는 사람, 케이크형 인간은 다양한 부재료를 활용하며 장식적인 요소가 중요시되는 케이크와 페이스트리를 즐겨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온전히 나의 관점이지만 이 기준에서 나는 백 프로 빵형 인간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왜 아침형 인간이죠?’라고 물을 수 없듯이 나는 그저 빵형 인간으로 태어났다. 장시간의 발효과정을 거쳐 반죽을 관찰하면서 맛과 모양을 만들어가는 발효빵을 만들 때 나는 어렵고 지루하기보다는 흥미롭고 여유로운 편이다. 그러한 내가 케이크를 만들 때는 정리정돈이 안 되고 실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베이킹 학교에서 만들었던 웨딩케이크

내가 빵형 인간임을 정확하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가 빠질 수 없다는 선입견을 고수하며 케이크 만들기에 도전했다. 사실은 내가 만든 케이크 시트를 가지고 아이와 함께 꾸며보는 것이 엄마로서의 로망이기도 했다. 베이킹 학교에서 대부분의 케이크 시트와 크림, 글레이즈 제조법을 배웠었고 장식의 끝판왕인 웨딩케이크도 해봤는데, 뭐! 케이크 챕터를 배울 당시 몹시 스트레스받았던 기억은 이미 7년도 더 되어 희미해져 있었다.


베이킹 친구 마르셀라를 위해 내가 만들었던 케이크

먼저 학교에서 필기했던 노트와 수많은 레시피가 담긴 베이킹 원서를 꺼내 내가 실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케이크 플랜을 짜보기로 했다. 막상 책을 펴고 여러 가지 케이크 사진을 보다 보니 도전 정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어떤 화려한 케이크도 다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정신 차려야지. 난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면 부지런히 가사를 끝내고 남은 시간에나 겨우 빠듯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다둥이 엄마다.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으로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는 케이크를 선택하는 것이 맞았다.


과거 사진을 찾아보면 심플한 케이크를 주로 만들었었다. 순서대로 크레이프케이크, 치즈케이크, 당근케이크, 레드벨벳케이크.

작업 공간, 도구, 재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케이크 제조 능력의 한계를 감안하여 선택한 케이크는 시폰 스펀지케이크 시트를 사용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딸기 장식은 아이가 특별히 요청한 것이었고, 생크림 아이싱은 만들기가 단순해서 선택했다. 시폰 스펀지케이크는 재료와 작업 과정이 비교적 단순해서 선택했는데 사실 수업 시간에 만들어 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내 노트에는 'Do not use convection oven for baking chiffon sponge cakes. It will harm your cake.(시폰 스펀지케이크를 구울 때 컨벡션 오븐을 사용하지 마라. 케이크를 망치게 될 것이다.)'라고 선명하게 필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내가 가진 오븐은 컨벡션 오븐뿐이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하는 어떤 케이크도 강한 열풍으로 굽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다른 방식의 오븐이 없다고 해서 내 로망을 바로 포기할 순 없었다.


시폰 스펀지케이크 제조과정은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다. 달걀의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한 뒤, 노른자는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등 체친 가루와 섞고 흰자는 설탕과 거품기로 섞어 머랭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노른자 반죽과 머랭을 섞어주면(폴딩) 완성인데, 머랭을 만들면서 반죽 내로 유입된 공기가 오븐열에 의해 부풀면서 부드럽고 가벼운 질감의 케이크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머랭의 부피가 줄어들지 않도록 신속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다루어 균일한 반죽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머리로는 분명히 잘 알고 있었는데 폴딩까지 끝내고 케이크 팬에 반죽을 부어보니 믹싱볼 밑바닥에 제대로 섞이지 않고 분리된 반죽이 보였다. 안 되는 걸 알지만 이미 부은 반죽을 다시 꺼내려면 팬과 팬 아래 깔아놓은 테프론 시트까지 모두 세척해서 말려야 하는데 그러는 동안 반죽이 망가질 것만 같고, 새로 반죽을 만들자니 시간 내에 완성을 못할 것 같았다. 경험과 자기 확신의 부족에서 오는 조급한 마음이 케이크의 실패를 예고하는 듯했지만 케이크 반죽은 그 상태 그대로 오븐에 들어가고 말았다.


아이싱은 아이와 함께(우측 하단은 떡진 케이크 시트)

케이크가 구워지는 내내 오븐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는 했지만 반죽은 생각보다 잘 부풀어 올랐기에 나는 다시 성공의 희망을 품고 완전히 식은 케이크를 빵칼로 3등분해 보았다. 그런데 케이크 안이 엉망이었다. 균일하게 섞이기 않은 반죽이 서로 다른 질감으로 익어서 기하학적인 무늬를 형성했고 가운데 부분은 떡진 것처럼 심하게 축축하고 물컹했다. 오븐 안에서는 잘 부풀어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식히고 나니 가운데 바닥 부분이 움푹 들어간 채 꺼진 모습이었다(다 구워진 시폰 케이크는 형태 유지를 위해 팬을 뒤집은 채로 식히기 때문). 아이싱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고 해도 살릴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케이크 맛과 상관없이 즐겁게 작업하는 아이

다행히(?) 반죽을 넉넉하게 해서 케이크팬 2개 분량을 구웠기에 많은 부분을 잘라내고 버려도 아이와의 데코놀이를 위한 케이크 하나는 남길 수 있었다. 너덜너덜하게 잘린 케이크 시트의 모습이 내 심정과 같았지만 데코만 가능하다면 그런 것쯤 상관하지 않는 아이 덕분에 금세 크리스마스 무드를 되찾았다. 스패츌라와 짤주머니를 손에 쥔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해맑게 웃어줬다. 아이는 신경도 쓰지 않는 일에 나는 왜 불필요한 자존심과 완벽주의로 특별하고 즐거운 하루를 망치려 했는지 모르겠다.


맛은 없어도 사진은 예쁘게 찍기
커팅 후 적나라하게 드러난 민낯. 떡케이크 아님 주의.

아이를 시켜 케이크 재료보다 비싼 딸기를 올리고 케이크 픽과 초를 꽂았다. 마무리로 크리스마스 컬러의 스프링클까지 뿌리니 오, 제법 그럴싸했다. 이제야 진짜 크리스마스 같았다. 케이크형 인간들은 이러한 재미와 성취감으로 케이크를 만들겠지? 그렇게 기분을 전환하고 아이와 함께 케이크 한 조각을 맛보았다. 아이가 말없이 한 조각을 모두 먹어 치우기에 그래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닌가 했는데, 그 이후 며칠이 지나도 더 달라는 요청이 없다. 남은 케이크는 아직도 밀폐용기에 담겨 냉장고 맨 위칸에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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