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위에 세워진 마법의 돔

(스포주의) 라스베가스에서 만난 21세기 오즈의 마법사

by 모먼트그래퍼

마법사는 에메랄드 시티에만 있는게 아니다.

라스베가스의 아이코닉한 신상 랜드마크, 스피어(Sphere)에서 구글 AI가 마법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축구장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구형 돔 표면에 120만 개의 LED가 라스베가스의 밤하늘을 압도하는 빛의 향연을 보고 있자니, 이거야말로 21세기형 에메랄드 시티의 마법이 아닐는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밤, 라스베가스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스피어의 LED 쇼는 도심 한복판에서 돌아가는 초대형 디스코 볼을 보는 것만 같다. 빛은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깜빡이며, ‘어서 와, 여기서 미친 듯이 즐겨봐!’ 하고 유혹한다.


솔직히 라스베가스 여행을 나선 이유의 5할은 스피어 때문이었다. 2023년에 문을 연 이 랜드마크는 온갖 화려한 공연으로 세상을 들썩이게 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내 심장을 낚아챈 건 다름 아닌 '원조 아이돌 보이밴드' 백스트리트 보이즈(Backstreet boys, BSB)의 몰입형 콘서트 영상이었다.

그 짧은 영상이 내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단 몇 분이었지만, 완벽한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랄까. 90년대 말의 감성과 CD플레이어를 돌리던 어린 시절의 나를 단번에 소환한 타임머신이었다. 그 순수한 열광과 설렘, 그리고 팝 아이돌과 함께했던 내 20대가 손 흔들며 BSB의 히트곡인 "I Want It That Way!" 를 외치는 느낌.

그렇게 스피어는 내 여행 버킷리스트에 올라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BSB 공연이 8월에 종료된 후 10월 여행을 나선 나, 하지만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12월 말에 공연이 추가된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해버린 덕에 여행 일자는 그 사이에 낀 징검다리 연휴처럼 되어버렸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지 않나.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인지, 아니면 신의 장난인지!


아쉽게도 BSB 공연은 놓쳤지만, 스피어에서는 또 다른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바로 1939년 고전 중의 고전인 영화 《오즈의 마법사》가 상영되고 있었다. 단순한 리마스터가 아니었다. 구글의 최첨단 생성형 AI 기술이 총동원된,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 오즈의 마법사'였다. 상영이 시작되자마자 눈앞을 가득 채운 빛과 소리, 촉각과 진동까지 내 뇌는 ‘좋아요’를 연속으로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포 포함]


일단 흑백의 캔자스 마을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360도 돔을 집어삼켰다. 이내 곧 거대한 토네이도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듯 솟아올랐다. 4D 영화관처럼 좌석이 거칠게 흔들리고 사방에서 바람 소리가 몰아치며 종이 낙엽까지 객석에 휘날리자, 도로시의 집과 함께 하늘로 빨려 올라가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는다. 사과나무 숲 장면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다른 차원이 열린다. 성난 나무들이 가지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장면에 맞춰, 머리 위로 사과처럼 보이는 둥근 빨간 스펀지 물체들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물리적 체험에 객석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과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날개 달린 원숭이들의 형상이 조명에 비쳐 객석 위를 날아다니고, 무대 앞쪽에 실제 화염 불쇼까지 펼쳐지니 잠시나마 여기가 라스베가스 스피어가 아니라 오즈의 세계 한복판에 발을 디딘 듯 현실의 감각이 서서히 희미해진다.

양귀비 밭에 잠든 도로시가 깨어나는 장면


그 4D 끝판왕인 몰입형 공연장에서 현실과 디지털의 경계가 흐려지고, 나는 어느새 작은 도로시가 되어 인공지능이 만든 노란 벽돌 길(Yellow Brick Road)을 따라 걷고 있었다. 신경세포들이 파티를 벌이는 것처럼 짜릿함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늘만큼은 도파민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 아니, 자발적 노예라 더 신난다구!”


BSB 공연을 놓친 아쉬움을 덮어버릴 만큼, 《오즈의 마법사》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 여행을 반짝이게 했다.

스피어 주변을 거닐다 보니, 영화 속 세상에 완전히 몰입한 채 도로시 소녀 코스튬을 입은 멋진 금발의 언니(?)가 눈에 띄었다. 반짝이는 루비 신발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나 역시 '오즈의 노란 벽돌길‘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실 이 노란 벽돌길, 알고 보면 단순한 길이 아니다. 세상의 수많은 길 중 가장 유혹적이면서도, 어쩌면 가장 위험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숨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는 단순한 동화 속 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여정과 선택, 유혹과 허상에 대한 경고까지 담고 있는 매우 강력한 상징이기 때문에 여러 예술 작품에서 노란 벽돌길을 메타포로 끌어다 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때 엘튼 존(Elton John)의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즐겨 듣기도 했던지라 노란 벽돌길의 의미가 쉽게 잊히지 않았었다.


프리퀄 격인 《위키드(Wicked)》 뮤지컬과 영화에서도 이 노란 벽돌길은 마법 같은 환상을 보여주지만, 결국 그 길 끝에 있는 에메랄드 시티는 기대와 달리 허무하지 않은가. 결국 진짜 중요한 건 그 길 위에서 ‘나’만의 선택을 찾아내는 순간이다. 엘파바 마법사가 번쩍이는 겉치레 뒤에 숨겨진 위선을 꿰뚫어 보고 과감히 등을 돌렸듯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즈의 세계관에서 도로시보다는 마법사 쪽에 더 마음이 간다. 그 세계관의 매력 포인트는 바로 마법! 그 매력은 개성 폭발 마법사 듀오—초록빛 카리스마 엘파바와 반짝이는 공주풍 마법사 글린다—에게서 나온다.

도로시의 좌충우돌 모험담도 물론 귀엽지만, 둘만의 서사와 존재감이 주는 그 강렬함에는 못 미친다.

피부색부터 초록초록한 시선 강탈 마녀가 빗자루 하나 들고 세상을 향해 “그래, 나 위키드(Wicked) 마녀 맞아!”라고 선언하듯, 오즈의 낡은 질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중력을 가볍게 무시하며 ‘Defying Gravity’를 터뜨리는 순간—그 짜릿함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리고 글린다? 반짝이는 분홍 드레스에, 세상 가장 착한 척 해맑게 웃으면서도 은근히 계산적인 그 느낌—그게 또 묘하게 중독적이다. 패션 센스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 드레스라면 에메랄드 시티 런웨이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스피어 밖으로 나오며 밤공기를 들이마시니, 눈앞에는 아직도 황금빛 노란 벽돌길이 아른거렸다.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서 잠깐이나마 오즈의 세계를 걸었던 게, 이상할 만큼 현실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한 라스베가스도 알고 보면 에메랄드 시티처럼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곳이니까. 그래서인지 도로시가 왜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괜스레 공감이 간다. 결국 우리 모두, 화려함에 취했다가도 ‘집이 최고야’ 하는 마음 하나는 똑같은가 보다.


흥미로운 건 원작 속 오즈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 둘러싸인 고립된 지역이듯, 라스베가스 역시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홀로 반짝이는 도시라는 점이다. 그러니 스피어에서 구글 AI가 재탄생시킨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는 건 기막힐 만큼 절묘하다. 마치 화려한 카지노와 네온사인의 미로 속에서

“조심해. 반짝인다고 다 진짜는 아니야.”라며

마법사가 귓속말하는 기분이랄까. 도로시가 세 번 구두 굽을 부딪히며 주문을 외웠던 것처럼, 나도 마음속으로 조용히 따라 해본다.

“There’s no place like home.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


생각해 보면, 행복이라는 건 거창한 마법이나 반짝이는 에메랄드 시티 같은 데 숨어 있는 게 아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듣기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거나, 여행지에서 예상외로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라스베가스 핫스폿인 하이롤러와 스피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방으로 업그레이드되는 뜻밖의 행운을 만나는 순간 같은, 그런 아주 사소한 순간에 숨겨져 있다.


여행도, 삶도 그 점에서는 비슷하다. 누구나 자기만의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지만, 그 길이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잠시 헤매고, 빙 돌아가고, 길 위에서 뜻밖의 마법을 마주치는 순간들이야말로 진짜 축복일 테니까.

결국 누구나 자기만의 오즈를 향해 걷는 중이고, 가끔 길을 잃는 것조차 인생이 주는 작은 서프라이즈일지 모른다. 뭐, 길 잃으면 또 돌아가면 되니까-도로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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