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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그래퍼 Jan 12. 2021

푸른 해원을 향해

블루 드레스의 남자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나라의 축제를 즐기는 것일 거다. 여행 중 이 ‘축제’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는 순간 여행의 행복지수는 몇 배는 더 올라가기 마련이다. 특히, 전 세계적인 축제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행운의 여신과 함께한 것 마냥 색다른 여행으로 기억될 수 있다. 일부러 스페인 토마토축제, 이탈리아 베니스 카니발, 브라질 리우 카니발 등 세계 이색 축제를 찾아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기까지 하지 않던가. 게다가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거리 행렬 퍼레이드를 직접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야말로 횡재수. 그런 행운이 나 홀로 떠난 호주 시드니 여행 중 우연히 찾아왔다.

바로 마디그라(Mardi Gras Parade) 축제, 매년 시드니에서 열리는 성소수자들을 위한 축제였다.

참석자 국적, 참석인원, 다양한 이벤트 등 그 규모가 세계 최대인 동성애 축제로 1978년 6월, 시드니의 동성애자와 성전환자들이 동성애 차별법에 대항하기 위하여 행진을 한 것으로 시작되었고 세계 각국의 동성애자들이 자기네 나라 피켓을 앞세우고 행진도 하며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애정표현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축제는 현재 단순히 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가 성소수자와 어울려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 시사상식사전, “마디그라 축제”, Naver 지식백과


어라?! 최초 개최연도가 1978년이라니!

내가 태어난 해라 동시대 같은 역사의 시간을 거쳐 온 동갑내기 친구처럼 괜스레 반가워졌다. 우연이지만 과할지 모를 의미 부여를 하며 축제를 즐길 생각에 어깨가 들썩들썩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왜 그런 축제를 보러 가?”라고 그들의 축제를 마뜩잖아하며 공감을 못 할지 모르지만 평소 '브로큰백 마운틴', '해피 투게더', '캐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 퀴어(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포괄적 단어) 영화에 대해 거부감은커녕 그들의 절절한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 흘릴 정도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의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편이다. 일부 나라에선 성소수자의 행진을 금지하기도 하는 만큼 오히려 쉽게 접할 수 없는 퀴어 축제를 현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길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오전은 때마침 시드니 헌터밸리(Hunter Valley) 와이너리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다. 투어 내내 조금씩 홀짝홀짝 테이스팅 와인 시음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살짝 취기가 올라와 기분 좋은 알딸딸한 상태로 저녁 축제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퍼레이드 출발점인 시드니 하이드파크(Hyde Park, Sydney) 거리를 향해 호기심, 설렘 가득 안고 목적지 근처 지하철역 출구로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Oh, my god!”

2002 월드컵 시청광장처럼 가득 메운 구름 인파를 시드니에서 마주할 줄이야. 거북이걸음으로 인파 속을 걷던 그때처럼 하이드파크와 옥스퍼드 거리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로 자의 반, 타의 반 오랜 시간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시드니 로컬 주민, 전 세계 여행자들과 어울리며 축제를 즐기는 모습들을 긴 호흡으로 선명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누르며 진귀하고 풍성한 볼거리들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피사체가 있다. 한 명의 성소수자인지 아님 축제를 즐기려는 여행자인지 모를 마린 블루색의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거리낌 없이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떤 거부감도, 편견의 'ㅍ'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역시 미소와 함께하고 있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카메라 셔터를 누른 순간엔 마린 블루 드레스의 주인공을 성소수자로 단정 짓고 여행객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으로 섣부르게 예단하고 있었다. 무의식 속에 성소수자와 일반인으로 분리하여 카메라 사각 프레임 안에 담아낸 것은 아닐지…

평소 사회적 약자에 대해 편견이 없다고 주저 없이 말하곤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 나중에 찍은 사진을 돌이켜보니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어쩜 이 축제는 놀이로서의 축제이기도 하겠지만 소통의 장이라는 성격으로 약 40년째 계속 이어진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마린 블루 드레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블루색에 관한 흥미로웠던 사실 하나가 떠오른다. 고대로부터 중세 초까지 블루색은 유럽의 역사에서 대접받지 못한 색이었다. 심지어 무지개에서도 블루색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될 정도 아니었던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블루색이라는 의미에 감정 이입한 듯 그 남자는 의식적으로 마린 블루색의 드레스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퍼레이드 행렬에는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깃발이나 플래그를 많이 볼 수 있는데,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에 맞서 싸우는 몸부림이 느껴졌다. 음란, 불법이 난무한 축제가 아닌 합법적인 문화축제로서 당당히 자신의 정체감을 드러내고 자기 긍정을 표현하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문득 학창 시절 문학수업에서 배웠던 유치환 시인의 시 ‘깃발’에서 그들의 애달픈 마음이 포개어지는 듯하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 유치환


아마 그들에게 푸른 해원은 편견과 차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의 세계일 것이다. 사회로부터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차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엄청난 고통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우울했던 차가운 편견의 시선들로 꽤 깊은 상처가 남겨졌던 터라 그들에게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남들보다 더 공감했을지도 모르겠다. 편견과 차별의 시선은 당사자에겐 엄청난 폭력이 되기에 그들은 깊은 슬픔과 고통 속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벗어나 두려움의 벽을 깨고 용기 있게 축제의 현장에 나오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손 내밀 차례가 왔는데 여전히 우리는 주저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무지개 기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존엄과 LGBT 사회 운동을 상징하는 기로 LGBT 커뮤니티의 다양성을 나타내며 처음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무지개색에 분홍을 더한 8색 무지개 기를 썼으나, 현재에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의 6색 무지개기가 쓰인다.

-「무지개기(LGBT)」. 『위키피디아』. 2020.08.29


그들이 바라는 이상향은 단지 성소수자만을 대변하는 세상이 아닐 것이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외모, 나이, 학력, 직업, 국적, 경제 수준, 건강 등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고 6가지 색을 넘어 훨씬 더 많은 색을 포함하는 무지개 사회에 닿아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1조에 따르면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법을 비웃기라도 한 듯 차별의 현장을 너무 자주 직시하게 된다. 서울 퀴어 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은 10년이 넘게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국민청원이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으니 퀴어 축제를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옳다는 식의 논리를 보고 있자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수결 자체의 한계에서 나온 소수에 대한 차별의 문제를 여전히 다수 만능의 논리로 해결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동물과 달리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유 능력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의 DNA를 갖고 있다. 이상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이 만만치 않지만, 비 온 뒤 나타나는 게 다름 아닌 무지개이지 않던가. 최근 전통과 보수적 문화를 가진 아시아 국가인 대만까지 동성결혼 법제화가 진행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만큼 유시환의 시구처럼 맑고 곧은 희망의 푯대를 세우고 인권과 평등을 위한 연대의 행진을 함께 걸어가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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