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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an 06. 2024

영화 '노량'의 시마즈와 사쓰마(가고시마)

천년 가문


어떤 한 가문이 천년 가까이 한 지역을 다스리거나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역이라 함은 도시도 해당되고 확장해서 국가로 넓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 총 역사가 2,200년을 넘겼지만 위의 조건엔 부합하지 않습니다. 395년 제국이 동서로 쪼개지고 수도는 그 이전 로마에서 오늘날 이스탄불로 천도해서도 그렇지만 공화정이든 제정이든 한 가문이 다스린 것은 천년의 역사에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도시와 가문이 일치될 정도로 피렌체 하면 떠오르는 메디치 가문도 1743년 마지막 메디치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죽으면서 그 도시의 지배력을 상실하였습니다. 15세기 초 1대 조반니 메디치 이후 350여 년간 지속된 역사입니다. 지금도 가끔 현존하는 메디치 가문의 후손들 이야기가 뉴스를 타기도 하지만 그들은 적통이 아닌 방계이고 더구나 피렌체엔 거의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계 역사상 단일 가문의 왕조로는 꽤나 길게 존속되었다고 하는 우리나라의 이씨 조선도 서울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발휘한 기간은 500년을 갓 넘겼을 뿐입니다. 1392년 시작해서 1910년 끝났으니까요. 지금 그 가문의 후손들은 존재 자체도 희미하고 그들 선조의 본거지였던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경우 천황도 기원전 660년 진무 천황 이후 한 가문이 내려오고는 있지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 교토에서 본거지를 오늘날 도쿄로 이전하였고, 역사상 진위가 불투명한 기간이 길었으며, 상징적인 존재로 지배력을 잃었던 시기도 많아 위의 두 조건을 충족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이렇듯 한 지역을 지배하는 천년 가문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가 모르는 유럽 어느 지방의 귀족이나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 그런 가문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기록되고 의미 있는 가문으로서 그런 가문을 찾기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일본 근대사에 대한 글을 몇 편 쓰면서 그런 가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상대로 그 가문은 일본에 있습니다. 바로 지난 12월 개봉하여 현재 천만 관객을 향해 달리는 영화 <노량>에서 우리의 이순신 장군과 맞서 싸우는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 분)가 소속된 가문이 바로 그 천년 가문입니다.


김한빈 감독의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 영화 시리즈의 완결편인 <노량>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시마즈 요시히로는 당시 규슈 최남단인 오늘날 가고시마 현인 사쓰마 번을 다스렸던 다이묘로 시마즈 가문의 17대 당주 자격으로 임진왜란에 출정을 하였습니다. 노량 해전을 치렀던 1598년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17대 당주였다는 것은 그 가문이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두 조건이 충족된다고 하니 그 가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고시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2024년 현재 시마즈 노부히사라 불리는 그 가문의 적손은 32대 당주로 가고시마에 살고 있습니다. 그냥 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바뀐 지금도 '시마즈공업'이라는 기업체의 회장(CEO)으로 있으면서 그의 선조들처럼 그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가고시마 현의 현민이라면 시마즈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시마즈 가문의 출현


시마즈 가문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1185~1333) 때부터 사쓰마의 실력자로 그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로 등장합니다. 시마즈 타다히사(?~1227)가 바로 그 가문의 1대 당주였습니다. 점차 규슈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던 그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1336~1573)를 거쳐 혼란기인 전국 시대를 거치며 규슈 지방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습니다. 본토인 혼슈에서 오다 가문의 노부나가와 그를 잇는 도요토미 가문의 히데요시가 활개를 펼쳤다면 규슈엔 시마즈 가문이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1587년 시마즈 가문은 규슈 완전 정복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상대편이었던 규슈의 오토모 가문이 혼슈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바람에 규슈 통일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규슈에서 날고 긴다고 해도 중앙을 휘젓고 다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강한 군사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멸문의 위기 앞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가문의 당주를 죽이기는커녕 그 가문이 정복한 규슈의 영지를 몰수하지도 않고 본래부터 그들이 살던 사쓰마 번 지역을 돌려주어 그곳의 번주 지위를 유지하게 해주었습니다. 영화 <노량>에 등장하는 시마즈 요시히로는 1587년 그 해 당시 52세의 나이로 시마즈 가문의 17대 당주로 취임하였습니다. 16대 당주였던 형 시마즈 요시히사가 규슈 정벌에서 패배하고 출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노량>에 비중 있게 출연한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 초상화. 노량 해전 참전 시 그의 나이는 63세임해전



임진왜란과 명량, 한산, 노량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출정 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조선 땅은 그에겐 작은 꿈에 불과했습니다. 영화 <노량>에서도 명나라의 진린(정재영 분) 제독이 왜군에게 화를 내며 소리친 정명가도()의 단계로 통과의례로 생각했던 조선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한반도를 유유히 통과해 명나라를 거쳐 동남아의 필리핀과 인도까지 정복하고자 하는 대망을 가졌습니다. 그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생전에 꿈꾸었던 대륙 정벌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은 그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20년에 걸친 전국 시대를 거치며 숱하게 전투를 벌여온 왜군들이었지만 조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 조선의 맨 앞에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정규군이 아니었던 우리의 의병도 있었으며, 곧바로 참전한 명나라도 그들의 가는 길을 막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일본이 수도 한양은 물론 함경도까지 밀고 올라갈 때 전라도는 바다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육지엔 경상도의 의병장 곽재우가 있어 안전했습니다. 마치 6.25동란에서 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필사적으로 사수했듯이 그들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가 있는 전라도를 일본의 육군과 해군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꽉 막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곳을 지켰기에 평안도 의주로 피난 간 무능한 임금 선조는 그곳에서도 수라상에 올라온 벌교 꼬막과 영광 굴비를 먹을 수 있었고, 그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왜군의 초반 기세를 꺾이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후 명나라의 참전으로 1593년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곳을 탈환함으로써 전쟁은 일진일퇴하며 휴전의 양상으로 넘어갔습니다. (개전 초기 이순신 장군, 곽재우 의병장 전라도 방어와 수라상 얘기는 한명기 교수의 강의를 기억했습니다.)


이윽고 명나라의 심유경을 대표로 협상에 이르게 됐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종전 조건의 하나로 조선 8도 중 남부 4개 도를 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심유경은 일본과의 교섭 조건을 각 나라에 숨긴 채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이렇듯 명나라의 참전과 종전 협상은 역시 또 6.25동란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나 봅니다. 우리가 약자였던 시기의 역사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1596년 협상은 깨지고 이듬해인 1597년 일본이 재침을 하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입니다. 그간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세 편의 영화를 연출한 김한빈 감독의 첫 번째 영화 <명량>과 마지막 영화인 <노량>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이 정유재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발표한 <한산>은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8월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그해 4월에 시작되었습니다. 1,761만 관객을 동원한 시리즈 첫 영화인 <명량>이 2014년 개봉되고 마지막 영화인 <노량>이 2023년 개봉되었으니 김한빈 감독의 임진왜란은 실제 전쟁인 7년보다 긴 9년이 소요되었습니다. 아마도 코로나가 없었다면 같은 기간인 7년으로 일부러 맞추었을지도 모릅니다.  


임진왜란 시 이순신 장군의 주요 해전 도표 (출처, 두피디아)



도요토미 히데요시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영화 <노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1598년 9월의 일로 그는 교토의 후시미 성에서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에 노량 해전이 일어났으니 이 기간엔 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의 철수가 최대 이슈인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의 종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다수의 부하 다이묘들이 반대했던 그 전쟁을 그가 무모하게 일으켰는데 그가 죽었으니 전쟁의 명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그가 죽으면서 한 가장 큰 걱정은 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늘그막에 겨우 얻어 겨우 5세에 불과했던 그의 어린 아들인 히데요리의 안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임종 직전 고다이로()라 불리는 다섯 명의 측근들을 불러서 어린 아들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영화에서도 나오는 장면입니다. 역할은 없지만 뒤편에 앉은 가신까지 포함하면 5인이 등장합니다.


그 자리엔 가신이지만 껄끄러운 정적이기도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래서 그가 1590년 일본을 통일하자마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당시엔 멀고 척박했던 에도로 영지를 재배치한 것입니다. 영화에선 고다이로 중 홀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주군과의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이 위반하고 2년 후인 1600년 일본의 천하를 양분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반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서서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일본을 완전히 통일했습니다. 그리고 1603년 에도에 도쿠가와 막부를 열고 쇼군의 자리에 등극했습니다. 그리고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눈엣가시와도 같던 주군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오사카 전투(1614~1615)에서 자결하게 만듦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을 일본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시마즈 가문의 부상


위의 내용은 이곳에 쓴 <메이지 유신의 프리퀄 세키가하라 전투>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당시 전 그 글에서 김한빈 감독의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영화 <노량>이 나온다면 거기엔 틀림없이 시마즈 요시히로가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전 영화인 <명량>과 <한산>에서 출연했던 왜장인 구루시마(류승룡 분)와 와키자카(변요한 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인물에 대한 캐릭터도 가장 강력하게 설정해서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노장인 시마즈 요시히로 역을 맡은 배우인 백윤식 씨도 그것에 부응하여 그 역을 잘 소화하여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를 하고 겨우 살아서 고향인 사쓰마로 돌아갔지만 그 해전으로 인해 철군하는 일본군의 퇴로가 열렸기에 귀국해서는 포상으로 영지를 하사 받았습니다. 그 이전 원균과 벌인 칠천량 해전에선 조선 수군에게 크게 승리했던 그였습니다.


영화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카운터 파트로 등장하는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 분) (출처, 네이버 영화)


시마즈 요시히로는 귀국할 때 빈손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노량 해전 전에 챙긴 일입니다. 그는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에서 가장 많은 조선의 도공을 잡아간 일본의 다이묘였습니다. 심수관과 박평의 등 조선 도공 80여 명을 그의 고향 사쓰마로 끌고 갔으니까요. 당시 사무라이들 사이에 다도는 유행했으나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던 일본이었기에 조선 민가의 밥그릇은 물론 개밥 그릇까지 쓸어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도공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43명만이 도착해 그들은 사쓰마 번에서 대대로 시마즈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 땅에서 도자기 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사쓰마야키의 시작입니다. 결국 그 조선 도공들이 개발한 도자기는 이후 유럽의 만국박람회에 진출하여 최고의 인기 상품으로 히트를 쳐 돌아올 때엔 그 판매 대금으로 군함을 사오기도 해 사쓰마 번과 일본의 부국강병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곳의 <일본의 근대화와 도자기> 편에서 상세히 설명되는 내용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명이 질긴 사랍입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벌어진 내전인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죽은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는 서군으로 출정했지만 승리한 동군의 대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또 살아서 고향인 사쓰마로 돌아가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서 목숨을 건지는 순간 그는 5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났던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그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목숨과 영지를 보전해준 것에 감사해 그의 편인 서군으로 출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향에서 출발할 때 데리고 간 병력을 거의 다 잃고 겨우 살아서 돌아갔는데 아마도 그때엔 2년 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하여 병력을 거의 다 잃고 귀국한 기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를 살려준 것은 그의 부하의 간언을 받아들여서였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쓰마 번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서군에 참전했고, 승리한 동군에 거의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가 늙어서 치매가 있어서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서군으로 참전했다는 등의 이유가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굴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렇듯 천년 가문의 기록이 완성되려면 산전수전 다사다난한 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면 시마즈 가문은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한 가문일 것입니다. 당장 그 시대인 전국 시대 그 가문 머리 위에서 일본 통일을 위해 전역을 휩쓸고 다니던 영웅 3인방 가문들 중 지금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 가문은 없으니까요.


고향으로 돌아온 시마즈 가문은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부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쿠가와 막부가 시작되었음에도 1609년 독자적으로 류큐왕국을 정벌하여 사쓰마 번의 조공국이 되게 하였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아들인 18대 당주 시마즈 타다츠네 때의 일입니다. 오늘날 오키나와 현이 된 류큐는 시마즈 가문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놨기에 메이지 유신기인 1879년 일본의 완전한 영토로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도 문제에 반면교사로 삼아야 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시마즈 가문의 본거지인 가고시마와 그 가문이 정벌한 남단의 류큐왕국, 오늘날 오키나와 (출처, 구글맵)



시마즈 가문의 개화(開花)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상무정신이 가장 센 지역을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가고시마입니다. 한마디로 호방하고 싸움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고시마에 쌀농사가 없다는 점에서도 기인할 것입니다. 과거부터 그곳은 화산지대라서 쌀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가고시마 앞바다에선 활화산인 사쿠라지마가 매일 연기와 재를 뿜어대고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신 고구마 농사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가고시마는 예로부터 주식인 쌀을 얻기 위해서라도 싸웠을 것입니다. 중앙 정부인 막부와 상관없이 벌인 류큐 정벌도 독자적인 생존을 위한 그들의 노력으로 이해됩니다. 위로 북으로는 올라갈 수 없으니 일찍이 아래쪽 남으로 바다를 탐한 것입니다.


시마즈 가문의 고택인 센칸엔에서 바라본 가고시마 만과 사쿠라지마 활화산


세키가하라 전투에선 망신을 당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혼줄이 났음에도 시마즈 가문은 이후 벌어진 오사카 전투엔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막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쓰마 번을 혼내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수차례에 걸쳐 막부군을 동원해 그곳을 공격하게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아마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시마즈 가문을 멸문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도 사쓰마와 시마즈 하면 넌더리를 쳤다고 하니까요. 결국 이러한 그의 후환은 훗날 발현이 됩니다.


일본의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시마즈 가문은 드디어 일본 역사의 전면에 서게 됩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주축 세력으로 조슈 번과 함께 사쓰마 번이 들어간 것입니다. 대표적인 유신 지사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쓰마 번 출신입니다. 하급 무사에 불과했던 그들이 유신의 주축으로 중앙 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시마즈 가문의 28대 당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지원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난학에 심취해 일본의 다이묘들 중 가장 개혁성이 강한 시마즈 나리아키라인지라 그들을 알아보고 가신으로 등용해 키워준 것입니다. 지금도 가고시마에 가면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건설한 일본 최초의 근대 공업단지인 쇼코슈세이칸(尙古集成館)이 메이지 유신의 유적지로 남아 관광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기 근대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쓰마의 개혁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1809~1858). 그는 오늘날 일본의 일장기를 국기로 만드는 데에도 일조함


그렇게 메이지 유신이 되며 실시된 폐번치현(廢藩置県)으로 사쓰마 번은 비로소 가고시마 현이 됩니다. 시마즈 가문은 가고시마의 왕으로서 누렸던 과거의 권력을 내려놓고 백작과 자작 등의 귀족으로 살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오늘날과 같은 사업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다수의 다이묘들과는 달리 부요로운 삶이 이어진 것입니다. 그 유신보다도 앞선 1865년 건설한 공단지인 쇼코슈세이칸도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했던 일입니다. 지금도 그곳엔 그때 만들어진 유리 공장이 150년 넘게 돌아가고 있어 견학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사쓰마기리코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물론 시마즈 가문이 키워낸 사이코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유신 1기 최고의 실력자였으니 특혜를 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2023년 봄 쇼코슈세이칸을 방문했을 때 시마즈 가문의 한 기업인이 나와 우리 일행을 안내하고 브리핑도 해주었습니다. 그 유적 단지 안 한편엔 과거 당주들이 거주했던 센간엔(仙巖園)이라는 고택과 정원도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가고시마 만이 고택의 연못처럼 보이고 지금은 육로로 연결된 사쿠라지마 섬의 화산이 집 앞동산처럼 보이는 곳입니다. 명함을 보니 까막눈인 저이지만 그가 시마즈 가문이 운영하는 여행사의 대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여행사는 위에서 설명한 현재 당주인 32대 시마즈가 회장으로 있는 시마즈공업의 계열사일 것입니다. 열정적으로 그의 조상의 유적지를 설명하는 그를 바라보며 저는 그가 과연 적손인 32대 당주와 몇 촌일까가 궁금했습니다.


시마즈 이름과 가고시마 지명이 선명한 시마즈 가문의 여행사 대표 (2023. 2)



천년 가문 시마즈


이렇듯 천년 가문을 향해가고 있는 시마즈 가문은 12세기 이후 일본의 주요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거쳐 전국 시대에 등장했고 우리의 임진왜란에도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내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류큐 정벌에도 등장했으며 결정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메이지 유신에도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별개로 일본의 부국강병에 기여한 도자기 산업에도 그 가문은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영향력은 32대 당주에 이른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과거와는 다른 형태이지만 여전히 그 지역 사회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모두 일본 규슈 최남단 사쓰마라 불렸던 가고시마 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볼 때 22세기를 돌파해 천년을 채우는 데에 크게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놀랍고도 신기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반도 남단 제주도의 어떤 한 집안이 고려말 무신정권 때 제주에서 말을 사육한 몽고군과 싸우고, 이씨 조선 건국에 등장하며, 임진왜란 때엔 왜군과 맞서 싸우고, 갑신정변 때엔 개혁파에 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해방 후엔 대한민국 건국에도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그 집안이 제주도를 떠나지 않고 남아서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는 모양새입니다. 아, 독자적으로 가까운 대마도 정벌도 했어야 했네요.


쇼코슈세이칸 단지 내 입점해 있는 스타벅스. 현관 위 검은 둥근 원내 십자가는 시마즈 가문의 문장


지금 가고시마 현의 그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상영 중인 영화 <노량>을 매우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그의 조상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 분)를 상당히 비중 있게 처리했으니까요. 어떤 방식으로든 모여서 그 영화를 볼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화 <노량>의 제작진은 시마즈 요시히로가 입은 30kg에 달하는 그 흰색 갑옷을 그의 고향 장인에게 의뢰해 직접 제작했다고 합니다.



* 이 글은 영화 <노량>을 보고 썼지만 그 해전에서 맹활약을 하고 장렬히 전사한 성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은 아닙니다. 일본의 근대사에 영향력을 발휘한 시마즈 가문에 포커스를 두고 쓴 글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화 감상문은 많기도 하거니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기에 이 글에선 다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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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주에 열리는 아래 저의 북토크 참석을 희망하는 브런처님들은 kay68@naver.com으로 연락을 주시면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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