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Mar 30. 2024

바르셀로나의 성인 가우디 <상>

스페인-카탈루냐-바르셀로나-가우디

2024년 3월 중순,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를 비롯해 지중해 연안에 흔치 않게 많은 양을 퍼부운 스페인의 비는 오랜 가뭄을 해갈하는 반가운 봄비라고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스페인에 첫 발을 내디딘 3월의 그날도 그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 방문지인 바르셀로나에 착륙하자마자 그 나라에서 가장 먼저 몸으로 저를 맞이해준 것은 비였습니다. 농부에겐 아니겠지만 여행객에게 비는 좋은 자연의 산물이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그날 제가 맞은 비는 체온까지 떨어트려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머릿속에서 그려오던 쨍한 태양의 나라라는 그림과는 다른 스페인의 첫 정경이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화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의 엘프라트 공항은 유럽의 여타 도시들과는 달리 예상보다 깨끗하고 산뜻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곧바로 올림픽을 치른 도시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공항이 깨끗하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어서 프레디 머큐리와 몽세라 카바예가 듀엣으로 부른 <바르셀로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마치 오페라와도 같이 웅장한 그 크로스오버 노래가 제 눈 옆으로 길게 곡면으로 이어지는 공항 입국장 끝까지 울려 퍼지는 듯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 막 도착한 저를 환영하는 노래로 말입니다.


<바르셀로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였습니다. 그 올림픽은 레콩키스타라 불리는 국권회복운동의 결과로 1492년에 달성한 스페인 통일과 그 해에 콜럼버스가 그 나라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 국가적으로 거행한 이벤트였습니다. 1992년 그 해 스페인은 세비아에서 엑스포까지 열어 같은 해에 세계 3대 이벤트 중 두 개를 진행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나머지 하나 월드컵은 그 10년 전인 1982년에 열렸습니다.


팝과 오페라의 최고의 만남. <바르셀로나>를 열창하는 프레디 머큐리와 몽세라 카바예 (바르셀로나 1988. 10)


록그룹 <퀸>의 전설적인 싱어 프레디 머큐리는 영국인이지만 그가 바르셀로나 출신의 전설적인 소프라노 가수인 몽세라 카바예를 좋아해 그 올림픽 주제가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 개막일 메인 스타디움 무대에서 그 둘이 함께 불렀어야 할 그 노래는 프레디 머큐리가 올림픽 7개월 전에 에이즈로 사망하면서 다른 노래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바뀐 그 주제가 노래는 몰라도 그 둘이 함께 부른 <바르셀로나> 노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도시의 올림픽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아니 역대 그 어느 올림픽 주제가보다도 프레디 머큐리와 몽세라 카바예가 부른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셀로나를 전 세계에 알리는 시가(市歌)가 되어버린 듯한 명곡 <바르셀로나>입니다. 물론 우린 자국민이기에 바르셀로나 올림픽 바로 전에 열린 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가인 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만들어진 가왕 조용필의 올림픽을 위한 노래인 <서울서울서울>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르셀로나는 몽세라 카바예 이외에 성악가로는 세계 3대 테너라 불리는 호세 카레라스도 태어난 도시입니다. 그의 이름에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자국의 라이벌인 플라시도 도밍고는 마드리드 출신입니다. 물론 또 한 명의 테너인 작고한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출신입니다. 호세 카레라스와 플라시도 도밍고는 축구광이라 노년에 접어든 지금도 지역 연고 팀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FC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가 그 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팀은 단순한 축구팀이 아닙니다. FC바르셀로나는 레알마드리드가 수도 마드리드를 상징하듯이 바르셀로나의 상징과도 같은 팀입니다. 스페인의 뿌리 깊은 반목의 역사가 그 두 팀에 옮겨 붙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17개의 자치주로 이루어진 스페인. 프랑스와 가까운 카탈루냐주의 바르셀로나는 수도 마드리드에 이은 제 2의 도시 (출처, 두피디아)


사람들은 라이벌 이상의 라이벌인 그 두 팀의 경기를 엘 클라시코(El Clásico)라 부릅니다. 이건 스페인어이지만 엄밀히는 마드리드가 속한 카스티야 지방의 언어입니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사람들은 엘 클라식(El Clàssic)이라 부릅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는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카탈루냐 이름이고 스페인어로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í)입니다.


즉, 카스티야어가 표준어로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스페인어가 된 것인데 이것은 1492년 스페인 통일 시 카스티야 연합이 카탈루냐가 속한 아라곤 연합보다 우위에 서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위의 콜럼버스를 후원한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의 끗발이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보다 컸기에 그녀 출신 지역의 언어가 스페인의 제1 언어가 된 것입니다. 그들 부부는 결혼을 하고서도 결혼 전 다스렸던 각자 왕국의 영토를 여왕과 왕의 이름으로 따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카스티야어에 밀린 카탈루냐어는 스페인의 공용어로 남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은 이외에도 북부 갈리시아와 바스크 지방의 언어도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엘 클라시코는 영어로 더 클래식(The Classic)입니다. 통상 더비라 부르는 일개 축구팀 간의 경기를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만큼 경기 수준도 높지만 위의 두 지방 언어의 예에서 언뜻 보듯이 그 경기가 내포하고 있는 게 많아서도 그렇습니다.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인 메시와 호날두가 전성기 시절 그 두 팀에 각각 소속되었을 때 가장 뜨거웠던 엘 클라시코였습니다. 현재 두 팀은 선수 경쟁 이상으로 축구장의 외형 경쟁도 치열해 그들의 전용 구장인 바르셀로나의 캄푸 누와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우의 확장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모두 1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구장으로 만드는데 레알마드리드의 경우는 공사가 끝나면 야구의 돔 구장처럼 지붕을 덮을 수 있는 첨단 개폐식 구장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태양의 나라를 잇는 정열의 나라답게 축구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되는 스페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FC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 선수들은 엘 클라시코가 열릴 시 전쟁 같은 대전을 치릅니다. 전쟁의 대리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명불허전의 호세 카레라스와 플라시도 도밍고도 같이 한 무대에 섰을 때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들이 태어난 지역을 생각하며 노래를 부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카스티야든 카탈루냐든 그 둘은 모두 스페인 사람인데 말입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그 정도의 경쟁 관계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일전에 이곳에 2회에 걸쳐 쓴 <마드리드의 밤거리>에서 스페인 역사를 다루며 기술하였기에 이 글에선 생략하겠습니다. 그 글에서 다룬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이슈는 2017년 실시된 투표에서는 90% 이상 찬성표가 나왔지만 코로나를 거치며 지금은 좀 잠잠해진 상태라고 합니다.


바르셀로나의 번화가인 람블라스 거리에 있는 고풍스러운 FC바르셀로나의 공식 매장


첨단의 대형 구장으로 재탄생 중인 레알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우 전용 구장


바르셀로나는 고대 카르타고와 로마가 3차에 걸쳐 120년(264~146 BC)을 끌고 간 포에니 전쟁의 영웅 한니발과 상관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Barcelona)란 도시 이름이 한니발 가문의 성인 바르카(Barca)와 유사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도시명이 그 바르카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그 도시를 건설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한니발이 역사에 등장한 2차 포에니 전쟁(218~202 BC)은 그가 오늘날 발렌시아 근교에 있는 로마의 도시 사군툼을 정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전 1차 포에니 전쟁은 그의 아버지인 하밀카르가 지휘관으로 로마를 상대했습니다.


한니발은 당시 사군툼에서 출발해 바르셀로나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고 오늘날 프랑스인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가 출정식은 바르셀로나에서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이 히스파니아라 불렸던 고대 로마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 바르셀로나의 이름은 이름은 바르키노(Barcino)였습니다. 로마인인 라틴족이 먼저 들어와 살았다 해도 이래저래 한니발 가문으로 인해 도시명이 결정되었을 수도 있을 법한 바르셀로나의 기원입니다. 하지만 도시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니발과 바르셀로나가 연계되는 것은 유리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이윽고 공항을 빠져나와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사진이나 영상 속에서나 보아온 옥수수 모양을 닮은 그 몽글하면서도 뾰족한 성당이 드디어 제 앞에 그림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여전히 비는 떨어지고 있지만 우산을 걷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고개를 드니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지는데 그 비 사이로 거대한 그 성당이 장엄하게 서있었습니다.


첫 느낌.. '비현실적'입니다. 숱하게 사진으로 봐왔음에도 "이 건축물은 뭐지?"라는 의심을 가득 품은 탄성이 제 입에서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벌어진 입 사이로 빗방울이 치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 성당은 유럽의 여타 성당들과는 달리 광장이나 도시 높은 곳이 아닌 바르셀로나 구도시의 밀집 지역의 한 블록을 차지하고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 마치 한니발이 살았던 카르타고 시대부터 있어온 고대 도시의 골목길을 걷다가 갑자기 두둥~하며 나타난 미래, 또는 우주에서 온 것만 같은 거대 구조물을 만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142년 동안 건축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2024. 3)


유럽에서 주재원 생활을 한 제 친구가 이야기하길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을 보고 난 후엔 유럽의 그 어떤 성당을 봐도 감흥이 없었는데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고선 그에 준하는 다른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로 판명되는 순간이 제게 왔습니다. 당시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제 경우 그런 건축물로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가 그렇다고 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 때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완성한 그 성당이 제 눈엔 베드로 성당에 비교할만하게 느껴졌기에 그렇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물론 규모와 상관없는 다른 느낌으로 말입니다.


아야 소피아는 건축물이 주는 비주얼적인 느낌도 그렇지만 그것이 532년에 준공된 성당이라는 사실에서 저를 더 감탄하게 했습니다. 그 성당이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며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로 사용되며 아야 소피아가 된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때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이어서 건축 감독을 맡기도 한 베드로 성당이 1623년에 준공이 되었으니 아야 소피아는 그보다 천년 정도를 앞선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크게 놀란 것인데 여기 스페인에 온 첫날 바르셀로나에서 그에 준하는 제3의 건축물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당은 주지하다시피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는 성가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당은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남편인 요셉,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당입니다. 그 성당엔 항상 그 성당의 건축가인 가우디 이름이 따라다닙니다. 그는 1883년부터 그 성당의 건축을 책임졌습니다. 그 1년 전인 1882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인데 건축 감독이 사임하며 곧바로 그가 바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가우의 생으로 살펴볼 때 하느님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의 사업에 더 달란트가 많거나 맞는 사람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날부터 가우디는 그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날까지 그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31세에서 74세까지 43년간 계속된 일이었습니다. 그 사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르셀로나 도시에 흩어져 있는 그의 다른 건축 프로젝트도 담당했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그가 죽은 1926년에서 98년이 지난 2024년에도 계속해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계산하면 142년 동안 공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기말과 20세기 초 지상 최고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1852~1926)


가우디의 죽음 후 전 세계는 과연 그 성당이 언제 완성될지 주목해 왔습니다. 가우디는 25% 정도의 공정만 진척시킨 상태에서 죽었으니까요. 본래는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성을 목표로 했지만 불시에 찾아온 코로나로 인해 현재 시점 그 성당은 그날 준공을 장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건축 스토리로 인해 신화가 연장되어 가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입니다. 가우디는 생존 시 공기를 200년으로 잡고 2082년 완성을 목표 시점으로 삼았었습니다. 그의 사후엔 위의 베드로 성당이 그러했듯이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후배 건축가들이 그가 그린 설계도를 연구하며 완성에 근접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태생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레우스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바르셀로나만큼이나 오래된 지중해 연안의 고대 도시인 타라고나와 가까운 입니다. 물론 바르셀로나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카탈루냐주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는 곳입니다. 그는 고향인 레우스에서 바르셀로나로 옮겨와 일생을 그 도시에서 보냈습니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고 그의 직업 이상의 소명(calling)인 건축가의 길을 평생 걸은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예사롭지 않은 죽음도 그 도시에서 맞았습니다.



* 다음 주말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비롯하여 바르셀로나에 산재한 가우디의 작품들과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 목동아 아닌 오 대니 보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