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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pr 13. 2024

스페니쉬 콜럼버스 <상>

콜럼버스 & 이사벨

1992년은 세계 엑스포(만국박람회) 역사상 가장 바쁜 전무후무한 해였습니다. 무려 한 해에 3개의 엑스포가 열렸으니까요. 그것도 모두 유럽에서 열렸습니다. 스페인의 세비야, 이탈리아의 제노바, 그리고 네덜란드의 주테르메이르에서 열렸습니다. 이들 중 주테르메이르 엑스포는 성격이 다른 원예박람회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비야와 제노바는 똑같은 기치를 걸고 전 세계 모든 엑스포를 주관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에 유치를 신청했습니다. 두 도시 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서 엑스포를 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신청한 엑스포는 엑스포들 중 가장 등급이 높은 등록박람회였습니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는 세비야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패자인 제노바가 그렇다면 그보다 등급이 낮은 인정박람회라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그해 제노바도 엑스포를 열게 된 것입니다. 1992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은 지중해를 접한 1,800km 떨어진 두 도시에서 열린 두 개의 엑스포를 즐겼습니다. 성적으로 보면 제노바의 참패였습니다. 그것도 대 참패였습니다. 70만 관객이 들어 역대 최하위 엑스포를 기록했으니까요. 반면에 세비야는 4천1백만 명의 관객이 몰려 대박을 쳤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3년 대전 엑스포는 1천4백만 명이, 2012년 여수 엑스포는 8백만 명의 관중이 입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둘은 제노바와 같은 세컨드 엑스포인 인정박람회였습니다. 최근 부산시가 유치전에서 실패한 2030년 엑스포가 최고 권위의 등록박람회입니다. 즉, 우리나라는 세계 3대 이벤트라 불리는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 중에서 엑스포는 아직 유치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1992년 세비야와 제노바가 그 정도로 경쟁을 벌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엔 동일한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그 도시들, 그리고 그 국가들은 마치 지적소유권을 주장하듯이 그에 대한 인물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쟁을 벌인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제노바는 콜럼버스가 태어나서 생가가 있는 도시이고 스페인의 세비아는 콜럼버스가 활동을 하고 죽어서 무덤이 있는 도시입니다. 결과적으로 사자의 집인 무덤이 태어난 집인 생가를 이겼습니다. 스페인의 콜럼버스가 이탈리아의 콜럼버스를 이긴 것입니다. 1992년 그해 스페인은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까지 거행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모두 이탈리안 콜럼버스가 스페인에게 안겨준 선물입니다. 물론 짐작되겠지만 그해 스페인은 올림픽과 엑스포를 개최하며 스페인 통일 500주년도 함께 걸었습니다. 그렇듯 500년 전인 1492년은 역사적으로 콜럼버스와 스페인에게 매우 의미있는 한 해였습니다. 세계지도와 국내지도를 모두 바꾼 해였으니까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표현한 제노바 엑스포의 엠블럼. 십자가 돛은 그의 기함인 산타마리아호를 상징
콜럼버스의 스페인이 둥근 지구를 연결했다는 것을 표현한 세비야 엑스포 엠블럼


지명도가 있는 어떤 사람을 검색해서 프로필을 보면 거의 첫 줄에 출생지가 나옵니다. 특히 역사적인 인물은 반드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망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따로 찾아봐야 합니다. 그러면 유명인이든 일반인이든 출생지와 사망지 중에서 어느 곳이 더 중요할까요? 저는 사망지라고 생각합니다. 출생지는 본인의 약력과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망지엔 그것이 어느 정도는 보입니다. 대개는 그가 활동했던 지역에 묻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의 선대의 역사가 아닌 당대의 역사가 있는 곳이 사망지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위의 콜럼버스의 경우에도 확실하게 그랬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생전에 스페인에서 많은 활동을 했고 많은 것을 이루었으니까요. 반면에 그가 태어나고 20대 중반까지 자란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선 활동 기록이 전무합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스페인에서 활동하고 그곳에서 죽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50~1506)


요즘 아이디어만 좋다면 그것을 실현시켜 주는 돈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자본은 넘쳐나지만 돈이 갈 곳을 못 찾아 투자자는 눈에 불을 켜고 투자할 곳을 찾으니까요. 이런 현상만 보면 아이디어를 소유한 개발자가 주도하는 시장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제 사항인 좋은 아이디어의 요건이 말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스타트업을 창업한 개발자들은 그들의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그렇게 뉴 비즈니스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개는 그들의 젊음을 바치며 시간과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그것에 올인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 비즈니스가 가시적이고 구체화되면 그것을 들고 투자자를 찾아다닙니다. 인간으로 치면 신생아 단계를 넘어서 사람의 꼴이 갖춰지고 스스로 걷기 시작할 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접촉하는 투자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개발자보다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개발자는 수많은 투자자를 접촉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그들의 아이디어를 높게 사주는 투자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이제 돈 걱정 안 하고 편하게 개발만 하면 되니까요. 어쩌면 그는 운 좋은 개발자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좋더라도 투자를 받지 못해 중도에 멈춰지고 사장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요. 이후 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그 스타트업의 상품이 시장에 나옵니다. 개발자와 투자자가 함께 긴장하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시장의 소비자는 투자자보다 또 더 냉정하니까요. 그래서 그 결과에 따라 개발자와 투자자의 관계는 이전과는 다르게 정리되기도 합니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말입니다.


522년 전 이 글의 주인공인 콜럼버스도 위와 똑같은 프로세스를 거쳤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포르투갈에서 직업을 찾았고, 그러다 뉴 비즈니스에 대한 확신이 들어 스타트업을 차리고, 여러 투자자를 찾아다닌 끝에 스페인에서 겨우 투자자를 만나 그의 뜻을 이뤘습니다. 그에게 투자를 결정한 투자자는 이사벨 여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그녀의 기대대로 그 투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습니다. 둘 다 해피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관계는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콜럼버스가 내놓는 결과가 시원찮아서였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이사벨 여왕은 차가워졌으며 그럴수록 콜럼버스는 반대로 뜨거워져만 갔습니다. 그에 따라 말년으로 갈수록 야만적이고 아름답지 못했던 그의 삶이었습니다.


1492년 스페인 통일과 신대륙 발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사벨 여왕 (1451~1504)


1492년 역사적인 그해 4월 한 협약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사자인 콜럼버스는 가슴이 뻥 뚫어질 정도로 시원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8년간 이곳저곳 투자자를 찾아다니며 애를 태운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날 시간을 끌던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드디어 그의 물주가 되어 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가 낸 아이디어를 사주고 뉴 비즈니스 파트너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는 그 몇 년 전에도 그녀를 만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실패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3개월 전인 1492년 1월 이사벨 여왕은 그녀의 남편인 페르난도 왕과 함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스페인을 완전히 통일했으니까요. 수 세기를 끌어온 국권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가 종료된 것입니다. 이제 800년에 걸쳐 그 넓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이슬람 왕조는 그곳에서 단 한 평의 땅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해서 눌러앉거나 본래 살던 북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국운 상승기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콜럼버스가 통일의 헤로인인 그녀를 다시 알현한 것입니다. 장소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살던 나스리드 왕조의 마지막 술탄인 보압딜의 항복을 받아낸 산타페였습니다. 산타페(Santa Fe)는 '성스러운 믿음'이라는 뜻으로 이사벨 여왕이 무슬림의 땅이었던 그곳에 통일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기독교식으로 이름을 지은 곳입니다. 통일과 동시에 그곳에서 맺은 콜럼버스와의 협약으로 이제 그녀에겐 또 하나의 성스러운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는 불가능했던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 협약의 이름도 산타페 협약이었습니다. 협약의 당사자인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은 성공을 기원하며 서로 손을 굳게 잡았을 것입니다. 아니, 여왕이니 손등에 키스를 했으려나요?


<그라나다의 함락>, 오르티스, 1882. 그라나다의 마지막 술탄인 보압딜이  이사벨 여왕 부부에게 항복하는 모습. 멀리 알함브라 궁전이 보임
<그라나다 왕국 보압딜 술탄의 고별>, 드오당크 (1822~1882). 모로코로 쫓겨가는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술탄


투자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이사벨 아니고 콜럼버스의 조건이 그랬습니다. 그는 여왕에게 그가 직행으로 가서 발견할 인도에서 나오는 수익의 10%를 달라고 했으며 그곳의 총독 자리를 요청했습니다. 그만이 아니고 그의 아들의 아들로 이어지는 세습직으로 말입니다. 여왕은 길고도 신중하게 고민을 했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장기적으로 그녀가 이룬 통일 국가 스페인의 미래 먹거리를 대거 확보하는 놀라운 결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기적으론 그렇지 못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가 친 큰소리와는 달리 대서양을 통한 인도 항로를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메리카 신대륙은 그의 계획과 상관없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니까요.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이 된 격입니다. 여왕은 그에게 항해 자금과 산타마리아호를 포함한 배 3척, 그리고 그 배에 승선할 선원들을 모집해 주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길일 수도 있어 응하는 선원이 없어서 죄수들에게 죄를 면책해주는 조건으로 모집했습니다.    


그 8년 전인 1484년 콜럼버스는 첫 투자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당시 그가 살았던 포르투갈 리스본의 왕궁에 기거하는 주앙 2세였습니다. 왕은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쪽 아래를 돌아서 인도로 가는 바닷길 개척에 몰입을 하고 있던 터라 대서양을 건너서 인도로 가겠다고 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다. 가능성이 없다고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전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적도 근처까지의 바닷길을 개척한 채 1461년 죽었습니다. 그렇게 아프리카 항로에 매달린 결과 포르투갈은 결국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인 희망봉을 발견하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10년 후인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그 동쪽 인도양을 지나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유럽인의 염원인 인도 항로 개척을 완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도로만 보면 포르투갈은 성공했고 스페인은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의 중심에 콜럼버스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거절을 당한 콜럼버스는 그의 30대를 온전히 투자받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곧바로 그는 국경을 지나 이사벨 여왕을 찾아갔습니다만 결과는 또 헛걸음이었습니다. 당시 여왕은 통일 이전이므로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신분이었습니다. 여왕이지만 왕비가 아닌 정통 왕이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통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79년 스페인 통일을 위해 아라곤 연합의 페르난도 왕과 결혼을 했지만 그 부부는 그 이전 그들이 다스리던 땅을 각자 다스렸으니까요. 그런데 그녀 쪽의 카스티야 연합이 파워가 커서 국정 운영은 여왕인 그녀 위주로 진행되었습니다. 카스티야어가 오늘날 스페인어가 된 이유입니다. 콜럼버스는 카스티야의 그녀에게 거절을 당한 이후에도 새로운 투자자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영국, 프랑스, 또 포르투갈 등을 전전했습니다.


카스티야 연합과 아라곤 연합이 동맹을 맺은 15세기 통일 직전의 스페인


대단한 열정입니다. 그가 조직을 거느린 것도 아니고 형을 잘못 만난 동생만이 그를 따랐는데 8년을 그렇게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헤맨 것입니다. 20대 중반 포르투갈에 정착해서 부유한 귀족의 딸과 결혼해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던 그였기에 그 열정은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그때 그가 왜 그의 고국 이탈리아를 찾아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피렌체엔 유럽의 금융을 쥐락펴락한 메디치 가문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그 시기는 메디치 중 최고로 강성했던 로렌초 메디치가 집권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바로 이전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동양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진 로렌초였는데 말입니다. 콜럼버스의 이탈리아 기록이 부재하므로 알 수는 없지만 역사가 모르는 말 못 할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전인 1476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1450년 이탈리아 북부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어떻게 자랐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직조공의 아들로 4남 1녀의 장남이었다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제노바의 상선에서 포르투갈의 해적선을 만나 표류하다가 리스본에 나타났다고 하니 고향 제노바에선 해양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고향인 제노바가 조선업이 발달했고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 패권을 다툰 해양강국이었으므로 그에게 바다는 무엇이든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리스본에선 동생과 함께 해도 제작업에 종사하며 바다를 연구했습니다. 귀족인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던 것도 그의 바다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증폭시켰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에 대한 일과 공부를 계속한 결과 그는 대서양을 통해 인도로 빠르게 갈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에게 그런 꿈과 확신을 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꿈을 준 사람은 마르코 폴로입니다. 그가 쓴 <동방견문록>은 당시 모험심이 있는 모든 유럽인을 설레게 한 책이었습니다. 책에서 그는 동양의 온갖 진귀한 물품과 희귀한 동식물, 그리고 신기술 등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특히 지팡구라 불린 일본에 대해선 모든 집이 금으로 된 기와로 덮여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마르코 폴로는 이 책을 직접 쓰지 않고 연애(로망스) 소설가인 루스티켈로에게 구술을 통해 쓰게 했기 때문에 보듯이 <동방견문록>은 내용의 사실성에 논란이 많은 책입니다. 소설가가 쓰기도 했지만 허구인 소설이 들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네치아 사람인 마르코 폴로는 콜럼버스의 고향인 제노바의 감옥에 갇혔을 때 그 안에서 소설가를 만나 이 책을 쓰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견문록>은 콜럼버스는 물론 그 이전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 등이 탐독을 하여 인도를 비롯한 동양에 대한 꿈을 키우게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곳에 제가 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설>에 상세히 나옵니다.


콜럼버스에게 동양의 꿈을 심어준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1254~1324)


콜럼버스에게 확신을 준 또 한 명의 인플런서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천문학자인 토스카넬리였습니다. 그는 지구구형설을 주장한 학자로 피렌체 두오모의 높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대서양을 통해 인도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와 편지로 의견을 교환하며 그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직접 실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럽이 바다를 통해 그토록 인도로 가고자 했던 것은 기존에 있던 육로가 막혀서였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있어왔던 실크로드가 오스만 제국이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그쪽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에게 대서양 항해의 확신을 심어준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토스카넬리 (1397~1482)


이제 유럽인들은 동양의 귀한 물품을 얻으려면 바다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양을 통해 인도로 가려했는데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통해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맞기만 한다면 누가 들어도 매력적인 제안이었겠지만 그 말이 진실로 믿기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콜럼버스의 생각은 맞았으나 수학 계산법은 틀렸습니다. 갈 수는 있지만 그가 계산했던 시간보다 더 오래 가야 인도가 나오니까요. 그것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은 포르투갈 사람인 마젤란입니다. 그도 콜럼버스처럼 본국이 아닌 스페인 왕인 카를로스 1세의 후원으로 1519년 세비야를 출발해 남아메리카 남쪽 끝을 돌아 태평양을 거쳐 인도양을 통해 1522년 돌아와 최초로 세계일주를 완성했습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원주민과 전투 중에 죽어서 그 결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아메리카 대륙까지는 콜럼버스가 개척한 대서양 항로를 통해 도달했을 것입니다.



* 다음 주말엔 4차에 걸친 콜럼버스의 항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후 행적에 대해서도 알아봅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천상 스페니쉬였던 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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