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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pr 06. 2024

바르셀로나의 성인 가우디 <하>

스페인-카탈루냐-바르셀로나-가우디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그를 알아본 평생의 후원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구엘 백작입니다. 그가 건축 박람회에 전시된 기묘한 작품을 보고 반해 출품한 건축가를 수배했는데 그의 앞에 가우디가 나타난 것입니다. 마치 그때부터 400년 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소년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고 그를 후원한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처럼 그 둘은 어느 날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예술가와 후원자의 관계로, 때론 건축가와 클라이언트의 관계로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시대를 열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엘이라는 후원자의 이름도 가우디에 의해 바르셀로나에 그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되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구엘 공원입니다. 사업가인 구엘은 가우디에게 바르셀로나의 카르멜 언덕에 영국식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하는 일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양 사업은 처음부터 삐걱대고 틀어져 그곳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르셀로나의 명작 구엘 공원이 되었습니다. 신식 주택단지가 되어야 할 곳이 신식 공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것도 엄청난 신식 공원으로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분양이 안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60 채로 예상된 그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분양이 되었다면 60 가구만 행복했을 텐데 그렇게 안 되어서 당시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행복했고, 그 후엔 그들을 넘어 전 세계인이 행복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 공원 안엔 당시 가우디가 살던 집이 지금도 있습니다. 분양은 실패했지만 그의 집, 구엘의 집, 친구 변호사의 집 등 3채만이 지어졌습니다. 모델하우스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구엘 공원을 직접 보고 그곳을 돌아보면 흡사 동화 속의 나라에 와있는 것만 같습니다. 혹은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제가 방문한 그날 하필이면 비가 내리치고 찬바람이 불었어도 그 느낌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방문자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드는 곳이 바로 구엘 공원입니다. 19세가 말에 그런 미래형 공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았을 때 느낀 아방가르드한 느낌을 그 공원에서도 고스란히 받은 것입니다. 가우디의 같은 DNA를 가진 장소이니까요. 그렇게 가우디는 그곳에 공원 작품을 남겼고 구엘은 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구엘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출입구와 바르셀로나 시내. 빗속에 멀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희미하게 보임


가우디는 자연뿐만이 아니라 문명이 배출한 모든 재료를 그의 건축의 소재로 사용하였습니다. 기존 소재인 돌과 흙은 물론 유리, 타일, 철재, 동물, 식물 등 모든 것이 그의 건축에 사용되거나 응용되었습니다. 그런 온갖 재료들을 기존 방식인 직선으로만 견고하게 작품화한 것이 아닌 곡선과 곡면으로 부드럽게, 때론 흐물거리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기둥도 반드시 직각이 아닌 사선으로 올라가는 방식을 썼고 그러면서 색상은 때론 현란할 정도로 울긋불긋하고 화려하게 당시로는 파격적인 건축물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런 율동감과 리듬감으로 인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은 그의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떤 한 가지 양식이라고 정의하기가 힘이 듭니다. 대표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보듯이 중세의 성당처럼 뾰족하게 올라가니 그것은 전형적인 고딕 양식이지만 그 안에 그만의 많은 장치와 아이디어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세기 말과  20세기 초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이지만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없는 그만의 건축 양식입니다. 때론 그가 활동한 곳을 따서 카탈루냐 모더니즘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난해합니다. 그냥 그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양식 더하기 가우디만의 양식이 '가우디 양식'이라 정의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봐도 아방가르드한 그의 작품입니다.


이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현재 입구인 '탄생의 문'엔 아기 예수의 탄생 때의 모습이 조각이나 부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의 가족과 그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위쪽으로는 돌이 흘러내리는 듯한 외벽이 보이는데 그 아기가 탄생한 시기가 겨울이라 고드름을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멀리서 몽글몽글해 보였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성당 위쪽을 올려다보면 푸른 숲처럼 보이는 녹지대가 어른거리기도 하고 울긋불긋한 컬러로 쓴 성구들과 도넛을 닮은 링도 보입니다. 성당 외벽의 그런 컬러와 소재는 오늘날조차도 오소독스한 성당 건축에선 보기 힘든 재료이고 장식일 것입니다. 


반대편 출구인 '수난의 문'엔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에 이르는 전 수난의 과정을 작업한 조각이나 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탄식, 그리고 그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거짓 키스 등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던 여인들인 여러 마리아가 보입니다. 특이한 작품은 아이들 숫자 놀이판 같은 사각 숫자판을 부조로 장식했는데 그 판 위에 배열된 숫자들의 합은 가로 세로 대각선 어떻게 더해도 33이 나옵니다. 33년을 이 땅에 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연도를 보여주고 있는 장식입니다. 위에서 '탄생의 문'을 현재 입구라고 표현한 것은 메인 입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 출입구가 될 '영광의 문'은 아직도 공사 중에 있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출구와 예수의 수난 과정을 표현한 작품들. 하단은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거짓 키스와 예수의 33년 생애를 보여주는 숫자판 부조


성당 실내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눈이 천장을 향하게 됩니다. 밖에서 보았던 그 첨탑들을 확인하고픈 것입니다. 그때 저는 마치 무슨 거대 동물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당을 지탱하는 곡면의 기둥들과 그것을 연결하는 보들이 마치 동물의 뼈가 연결된 것처럼 보였기에 그랬습니다. 고래 뱃속에 들어갔던 성서의 요나나 동화의 피노키오도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요? 사방의 그 기둥들은 공중의 한 소실점을 향해 사선으로 올라가기에 그 높이는 실제보다 더 아득해 보입니다. 그리고 곳곳에 박혀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과연 장관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라 제대로 된 자연광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디퍼런트하게 아름다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실내 모습. 하단은 기하학적인 천장의 모습


가우디는 성당 실내를 동물 속보다는 숲 속에 있는 듯한 아늑한 느낌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꽃을 닮은 하얀색 기둥을 설치하였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그 하얀 기둥에 자연의 그림을 그리게 함이었습니다. 마치 요즘의 미디어 파사드쇼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간 날은 햇빛이 없는 날이라 스테인드글라스의 자연쇼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조명을 사용했는지 일부 스테인드글라스는 화려하게 빛나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 속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카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이름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인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스테인드글라스 속에 그의 세례명인 안드레아의 이니셜인 A와 김대건의 KIM이 선명하게 써져 있습니다. 제가 나온 고등학교가 인천에 위치한 대건고등학교라 그 반가움은 더욱 컸습니다.


성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스테인 글라스. 하단은 우리의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하지만 이렇게 전위적이고 심미적인 건축물이라고 해서 가우디가 건축물의 실용성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구엘 공원의 예를 보겠습니다. 그 공원의 상부는 형형색색의 곡면의 타일로 낮은 펜스를 친 전망대 겸 광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 좌우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몬주익 언덕이 보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장소도 거대한 건축 구조물이었습니다.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도 같은 많은 기둥들이 그 광장을 떠받들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맨땅 위에 조성된 광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둥들의 안은 비어있다고 합니다. 물의 통로입니다. 제가 방문한 그날처럼 비가 내리면 광장에 내린 그 빗물은 그 기둥들 안의 공간을 타고 바닥 아래 지하로 흘러내려가 물 저장소에 고였었습니다. 물이 귀했던 시절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기 위해 그런 장치를 그의 건축물 안에 넣은 것입니다. 말 그대로 물 흐르듯이 말입니다. 사이즈는 다르지만 이스탄불의 지하 물 저장소였던 예레바탄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부가적인 기능까지 계산된 건축물들을 가우디는 아방가르드한 모습으로 완성했니다.


구엘 공원 전망대를 떠받들고 있는 기둥들. 비 오는 날엔 지하 물 저장소로 가는 물의 통로 역할을 함


성당과 공원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바르셀로나 시내에 들어가도 가우디의 작품들이 보입니다.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입니다. <카사 밀라>는 건축주인 밀라의 집으로 채석장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석기시대에나 있을 법한 돌집이기에 그렇습니다. 본래는 고급 연립주택으로 건축된 집입니다. 제 눈엔 재질은 다르지만 그 돌집의 모양은 흡사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에 산재한 동굴집처럼 보였습니다. 화성의 표면과도 같이 보였던 그곳에서 옮겨온 집처럼 보인 것입니다. 돌집임에도 마치 흙집처럼 부드러워 보여 더 그렇게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근처의 <카사 바트요>도 바트요란 건축주의 가족을 위해 지은 집입니다. 그 집은 리모델링 프로젝트였습니다. 그 두 집은 같은 곡면이라도 단색의 <카사 밀라>가 원시의 고대인이나 우주의 외계인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면 현란한 <카사 바트요>는 버섯 모양의 춤추는 집처럼 보여 동화 속의 주인공이 살 법한 집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도심 내 가우디의 그 두 집을 감상하며 다소 의아하게 든 생각은 그 집들이 옆 건물과 경계나 담벼락이 없이 착 붙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도시 건축법이 그렇다 해도 그래도 가우디의 작품이라면 간격을 두고 독립적으로 떼어놓을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사람이 안 살고 전시장으로 관광객들을 맞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인가 일상과 유리되지 않고 자연스레 도시에 녹아들어 작용하는 가우디의 건축 철학까지 보이는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였습니다. 아마도 그들 작품 양 옆의 건물들은 꽤나 비쌀 것입니다. 가우디가 그 건물주들에게 내린 축복입니다.


바르셀로나 시내에 있는 가우디의 주거 프로젝트인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


<카사 바트요>는 현재 알록달록한 막대 사탕으로 유명한 츄파춥스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츄파춥스도 바르셀로나에서 탄생한 캔디입니다. 동화 속의 집처럼 생긴 <카사 바트요>니 그 둘은 서로 잘 어울려 보입니다. 츄파춥스의 노랑 바탕에 빨강 사선의 경쾌하고 강렬한 로고는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디자인을 했습니다. 갈라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 평생 초현실적인 사랑을 나눴던 그였습니다. 달리도 역시 카탈루냐 출신으로는 바르셀로나와 140km 떨어진 프랑스 국경에 근접한 피게레스라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죽었습니다. 


이렇듯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유난히 현대사를 빛낸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카탈루냐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지인 주도 바르셀로나입니다. 이 글에 등장한 안토니 가우디, 살바도르 달리, 몽세라 카바예, 호세 카레라스는 물론 등장하지 않은 호안 미로, 파블로 카잘스, 이삭 알베니스까지 그들은 같은 스페인이지만 카스티야 지방과 수도 마드리드 입장에서 보면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훌륭한 문화예술 유산일것입니다.


가우디는 한 여인을 사랑은 했지만 달리처럼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상대도 달리의 갈라처럼 유부녀였습니다. 세 번 결혼한 여자였습니다. 그녀에게 실연을 당한 것이 그의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연애도 없었습니다. 36세부터는 카톨릭에 전적으로 귀의하여 사제와도 같은 독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탄력이 붙은 말년엔 구엘 공원에 있는 집에 거주하지도 않고 성당 지하의 조그만 방에서 기거하며 공사를 지휘할 정도였습니다. 공사현장에서 먹고 자고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짓는 건축이므로 신앙심의 발현으로 신의 영감이나 계시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평생 신실하게 살며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Soli Deo gloria) 작곡을 했다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연상이 됩니다. 물론 바흐는 가우디와는 달리 결혼도 했고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완성되었을 때 주탑의 최고 높이를 172.5m로 설계한 것도 신앙심의 발로였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높은 몬주익 언덕의 높이인 173m를 초과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위의 구엘 공원에서 몬주익 언덕이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한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지막 날 벌어진 마라톤 경기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의 구간으로 알려진 그곳을 무사히 통과하고 금메달을 땄기 때문입니다. 몬주익(Montjuïc)은 유대인의 산이란 뜻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카톨릭 개종을 강요당하며 처형을 당한 순교의 현장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가우디는 하느님이 만든 그 산의 높이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다는 신앙심에서 성당 주탑의 높이를 그 산보다 조금 낮은 172.5m로 결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탑'이라 불리는 탑입니다. 미완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그 높이까지 올라가고 주 출입구인 '영광의 문'이 지어지면 그 성당은 비로소 완성이 됩니다. 현재 그 성당 지하에 묻혀있는 가우디의 꿈이 완벽하게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조그만 방과 그의 무덤과의 위치가 같은 곳인지는 모르겠습니다.   


172.5m의 완성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중앙 주탑인 예수 그리스도 탑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가우디의 죽음은 더욱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전차에 치어서 그 후유증으로 죽었는데 당시 그의 행색이 노숙자와도 같이 형편없어서 전차 운전사는 그를 길옆에 대충 방치하고 그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그를 발견한 사람들도 그의 누추한 행색으로 인해 몇 번이나 택시의 승차 거부를 당한 후 그를 겨우 병원으로 옮겼는데 그 병원은 빈민 구호 병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제대로 된 병원에서 빠른 응급조치를 받지 않아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나중에 달려온 바르셀로나 시장과 주교 등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때라도 그를 정상적인 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가우디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걸작이고 감동입니다.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곳에서 죽는 것을 보여주시오.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죽는 것이 편하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의 몸엔 작은 성경책과 묵주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건축가이자 아름다운 신앙인 가우디, 역사상 그 어떤 건축가가 이렇게 한 도시를 그의 작품으로 온전하게 도배를 했을까요?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의 피안처인 예배당과, 그 사람들이 거주하는 일상의 주거지와, 또 그 사람들이 쉬면서 활력을 취하는 공원까지, 바르셀로나 도시의 이곳저곳에 시민을 이롭게 한 여러 건축물을 세운 가우디였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독실한 신자였으니 그는 바르셀로나를 수호하는 성인으로 추존되어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또한 고대부터 오랜 역사 속에 많은 영웅과 천재를 배출한 바르셀로나이지만 그들 중 넘버 1을 꼽으라면 그 또한 가우디가 마땅할 것입니다. 바르셀로나의 성인(聖人saint)이자 성인(星人star)인 가우디입니다. 그곳에서 그의 작품을 대했을 때 그의 소리가 들리 듯했습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하느님이 만든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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