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에스더 쉬퍼 갤러리(Esther Schipper)와리암 길릭(Liam Gillick)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리암 길릭(Liam Gillick) 작가 프로필 사진
예술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1990년대 초는 예술적 변화에 있어 그야말로 역동적인 시기였습니다. 미국 예술가들이 화랑과 기관에 대항하며 전통 아카데미 예술 지위에 도전하는 동시에, 경제 침체와 정치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유럽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요지로 급부상하게 되죠. 또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미디어가 발전됨에 따라,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는 상호 참여에 기반을 둔 예술 실험들이 범람하게 되고, 작업의 결과물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고찰이 본격화됩니다. 작품이 전달하는 의미가 작품을 창작한 작가에 의해 생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작품을 마주하는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교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 많은 예술가들이 주목을 하게 되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알려진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이 일련의 과정을 두고 예술을 구름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즉 예술가가 작품 속에 에너지와 의미를 응축시키면, 이것이 누적되어 최종적으로 관객들에게 비를 내리며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죠.
프랑스 출신 비평가 니꼴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는 이러한 경향을 두고 '관계 미학(Relational Aesthetic)'이라 정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활동이자 도구로서의 예술은, 세상과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기획이라는 활동을 통해 현실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은 요소를 다시금 소환해왔습니다.
이곳엔 매일 도시의 잔재를 줍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들은 대도시가 폐기하고, 멸시하고 망가뜨린 것을 목록화하며 수집한다. 그리고 그 생활의 쓰레기 더미인 아카이브는 이제 실용적인 혹은 쾌락의 대상이 될 것이다.
부리요는 그의 저서 『관계의 미학』에서 넝마주이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묘사를 예술가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위 인용구에 언급된 행위는 사회에 의해서 내버려진 잔재를 마치 보물 모으듯 수집하고, 다시 살려내는 과정으로서 20세기 모더니즘의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죠. 이는 주인이 던진 뼈를 다시 카펫 위로 주워오는 개의 모습을 연상시키도 하는데요. 역사적으로 국가 및 정부로 불리는 주권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기존 질서에 타당성을 부여하면서 주권의 이상화에 주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 되는 역할을 하는 예술가들은 새로운 버전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항상 재편집해왔죠.
관계 미학을 잘 대변하는 작가로는 지난주에 소개해드린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오늘 함께 살펴볼 리암 길릭(Liam Gillick)이 있습니다. 이들이 선보인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등의 작품은 모두 관람객과 다채널적인 소통 양상을 특징으로 한 플랫폼을 구현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죠. 특히 리암 길릭의 작업 전반에서는 세계화된 신자유적 논리에 의해 굳혀진 관념과 현대 사회의 결핍된 측면에서 인간이 공명하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건물의 구조와 공간을 작업의 주요 소재로 삼으며, 알루미늄과 플렉시글라스와 같은 상징적인 산업재료를 활용해 절제된 형태와 세련된 색감의 미니멀리즘적 추상을 그려내는 것 또한 작업의 주요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Liam Gillick, The Wright at Guggenheim Museum and The Logical Basis at Gare du Nord
리암 길릭은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2009년)에서 독일관 대표로 선정돼,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로 타국 국가관을 대표하는 외국인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데미언 허스트나 마크 퀸 등의 동료 작가들과 함께 영국 미술을 이끄는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s, yBa) 출신으로, 1980년대 말 이후 새로운 개념미술 열풍을 불러일으킨 젊은 예술가 중 한 명이죠.
1996년, 작가는 신작 "Discussion Island"을 선보이며 개념미술 작업의 시작을 알립니다. 여러 방면에서 예술 작품은 사회 문제를 둘러싼 토론을 유도하는 장소로 파악되는데요. 작가는 예술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품, 작가, 관람자 간의 상호 교류가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그는 일화적, 지역적, 그리고 지리적 관계 및 특정 사건에 대한 기존 의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과 결합하는 양상들, 그리고 그 영향들을 감지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을 작품으로 제시합니다.
Second Stage Discussion Platform. 1996 & Post Realization Platform (Purple). 2013
이러한 맥락의 대표적인 예로는 “Mirrored Image: A Volvo Bar”가 있습니다. 2008년 뮌헨 쿤스트베레에서 8막의 퍼포먼스로 선보인 해당 설치 작품은 25개의 싱글 파티션과 월 텍스트(타이포그래피), 그리고 극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작가가 디자인한 구조물 안에서 젊은 배우들과 협업하며 시대를 반영하는 텍스트를 발췌하고, 이는 전시 기간 동안 현장에서 펼쳐질 일련의 퍼포먼스로 재구성됩니다. 또한 지난 20년 간 리암 길릭의 작품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캐릭터들을 재소환하며 새로운 관계로 드러나길 시도하고 있지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은 각각의 색상과 크기로 구성된 칸막이 스테이지를 이동하며 퍼포먼스를 진행합니다.이를 통해 그의 작업에서 배우를 포함한 관람객 역시 전시의 일부로 들여오며, 작품과 전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일깨우고 있죠..
Exhibition view: Three Perspectives and a Short Scenario | Mirrored Image: A Volvo Bar. 2008
프랑스 철학자 퀀틴 메이아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이 주체와 객체 간의 상호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개념 자체가 인간의 의식과 상황의 공존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이 그림을 작품이 되게 하는 반면, 그 의식에 의해 활성화되지 못하게 된 작품은 단순한 사물이나 상품으로 변형되고 마는 것이죠.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세상과 맺은 관계의 다발이며, 또한 다층위적인 관계들을 무한대로 창조해낸다
위의 주장과 같이, 리암 길릭은 관객 참여를 통해 인간이 만든 세상을 비평과 만나는 미적 장(場)으로서삶과 예술 작품, 그리고 일상과 건축물, 혹은 사물 간의 관계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워크 라이프 이펙트
이처럼 리암 길릭은 작품에 미니멀리즘적 언어를 포함시키며, 예술이 사회와 시장경제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습니다. 작업 속 연속적인 특징, 미니멀리즘적 구조, 한정적인 배색은 바우하우스의 환경 디자인 실험이나 미니멀리스트 조각의 미학을 연상시킵니다. 우리가 단순히 바라보는 대상이 아닌, 소통과 논의를 위한 제의로서 기능하며, 어쩌면 미적 즐거움의 한계를 넘어서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죠.
특히 현재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The Work Life Effect]는 아시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생산과 관련된 문제를 비롯해, 일의 다양한 양태 및 동시대 추상에 대한 탐구를 이어갑니다. ‘워크 라이프 이펙트’라는 전시명과 같이, ‘일과 삶 간의 복합 미묘한 긴장 관계’와 그로부터 파생된 긴장감을 암시하고 있는데요. 특히 요즘 같은 디지털 팬데믹 시대, 일과 삶의 융합이 가속화되며 가져올 영향들을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합니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더 심화되는 현 상황을 지켜보고, 심지어 이번 방문을 위해 14일간의 격리를 마친 그는 이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일련의 과정을 직접 묘사한다기보다는, 익숙한 존재들과 새로운 모습으로 마주할 때 우리의 인식과 경험의 감정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해 황혼의 빛과 형태를 불러일으킵니다. 하이라이트 작품과 함께 살펴보자면, 전시장 벽면을 둘러싸고 있는 네온사인 작업 Animated lamps는 사람들을 일과 삶이 합쳐진 막연한 공간으로 들여오고 있는데요. 인간의 행복을 계산하는 공식을 포함해, 삶에 적용해볼 수 있는 다양한 공식을 제시하며 전시장 안에서 형형색색의 빛으로 관객을 맞이하고 있죠.
Exhibition view: The Work Life Effect Structure A, 2021. The Work Life Effect, Gwangju Museum of Art
전시장 한가운데를 보시면 Structure A 부스가 보이실 텐데요. 가벽에 설치된 작업들은 알루미늄 분말로 코팅된 수많은 핀들로 구성되고, 이 핀들은 일정한 거리에서 수직 및 수평 방향으로 부착되어 있습니다. 벽 위의 검은 비닐로 처리된 짧은 월 텍스트 또한 작품의 일부이죠. 색상 배합도 각각 다릅니다. 이렇게 분산적으로 배치하면서 생성된 간격은 정확하게 단정 짓기 어려운데요. 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 핀들 간의 구분이 흐려지고 조합이 변화되면서, 벽으로부터 핀들의 높이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죠. 실제 규모 이상의 스케일은 작가 특유의 시각적 환경을 조성하고, 관객들을 미니멀리즘적 풍경에 몰입시키며, 표현의 한계에 주목해 인식의 주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리암 길릭은 회화, 조각, 부조와 관련된 모든 속성을 작품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hibition view: The Work Life Effect Structure B, 2021. The Work Life Effect, Gwangju Museum of Art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 2층에 올라가 보면, 대형 유리 패널로 구성된 Structure B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창문이 텅 비어 있어 추상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동시에, 관객들을 검은 눈이 부드럽게 내려진 피아노가 서있는 한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중앙에 위치한 Factors in the Snow (Il Tempo Postino)는 자동 연주 피아노, 사운드 레코딩, 스노우 머신, 그리고 낙하하는 인공 눈으로 구성된 설치 작업입니다.
2007년 7월 12일 제1회 맨체스터 국제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필립 파레노와 서펜타인 갤러리 디렉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공동 협업 작업은, 맨체스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3시간짜리 공연으로 첫 선을 보인 바 있는데요. 피아노를 통해 울리는 선율은 리암 길릭이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곡으로 알려진 빌라 모레나의 Grândola, Vila Morena(그렌돌라, 검게 그을린 마을) 피아노 연주를 되새기며 작업한 일련의 퍼포먼스로 볼 수 있습니다.작가의 30년간 작업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인 만큼, 정말 다양한 작업들이 저희를 맞이하고 있는데요. 광주비엔날레 기간 동안(4.1 - 5.9) 꼭 방문하셔서 찬찬히 관람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리암 길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개념미술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다 보니, 니꼴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을 비롯한 다양한 이론가들과 함께 소개해드렸는데요. 내용이 다소 무거울 수도 있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시간이셨으면 좋겠습니다 :)
특히 이번 특별기획전에서는 본관 제1전시실과 2 전시실을 넘어, 미술관 도서관과 로비까지 작가의 설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니, 여유롭게 둘러보시면서 리암 길릭의 작품관에 흠뻑 빠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벌써 벚꽃이 만연한 4월이 되었네요.
그럼 다음 에피소드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All copyrights belong to Liam Gillick and Esther Schipper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