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네일 상의 이미지는 2016년 현대자동차 커미션 프로젝트로, 테이트 모던 터바인홀에서 개최된 <Anywhen(애니웬)> 전시 전경입니다. 보시는 것과 같이 필립 파레노는 전시를 개별 작품의 군집이 아닌, 일관된 '오브제'로서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또한 영상, 설치, 소리 등 각 요소의 조화로 이뤄진 라이브 퍼포먼스를 펼치며, 단 하나의 매체로 정의할 수 없는, 즉전시 자체를 작품으로 보면서 그 공간의 맥락을 작품 안으로 들여오는공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죠.
최근 전시로는 2018년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Gropius Bau)에서 열린 개인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Bau’라는 단어가 친숙하신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 이곳은 바로 바우하우스 창시자(발터 그로피우스)의 큰아버지(마틴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여러 건축 양식이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인 만큼, 세계적인 한국 아티스트 이불(Lee Bul, 2018) 및 티노 세갈(Tino Sehgal,2015)을 포함한대규모현대미술 전시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일단 전시홀 중앙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만들어진 한 겹의 층 사이로 검은 우물이 파져 있고, 그 위에 진동판을 설치해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필립 파레노는 매 전시마다 공간(혹은 건물) 및 도시의 역사를 답습하며, 이를 함께 전시공간에 들여오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베를린 장벽을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한 그로피우스 바우는 베를린의 생생한 역사 현장을 보유한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습니다. 분단 시절 서독에 소속되어있어 현재와 달리 서쪽에 입구를 내었던 건물 외벽에는 여전히 총탄이 박힌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죠. 작가는 이와 같이 건물 자체가 역사를 거슬러오며 지켜온 시간과 그 안에서 견뎌냈던 수많은 상처들을 작품으로 승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맥락에서다시검은우물을자세히들여다보게되면, 마치 물수제비를 떴을때 퐁당하고 올라오는형태처럼, 일정한울림이가득퍼졌다가다시중앙으로모이는동작이반복됨을보여줍니다.이는작가가살아있는역사이자이곳을스쳐간수많은사람들의숨결을시각적으로풀어낸것입니다. 또한 이러한움직임이랜덤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모두작가의계산안에서이뤄진다는점또한매우흥미로운데요. 바로에스더쉬퍼 갤러리에 함께 전속된작가이자, 안무가로도활동중인티노세갈(Tino Sehgal)에게물의흐름을표현하는안무를 작가가 직접 의뢰한 것이지요.
그들의또다른협업사례로는아트바젤(Art Basel in Basel) 기간에많이들찾으시는바이엘르재단(Fondation Beyeler, Basel)에커미션작업으로설치되어있으니, 팬데믹이끝나면꼭한번방문해보시길추천드립니다:)
스위스 바이앨르 재단(Fondation Beyeler, Basel)에 설치된 필립 파레노와 티노 세갈의 협업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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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파레노의 작업 전반을 살펴보면, 바로 앞전 전시에서 다룬 요소들을 조금씩 연장해오는 점 또한 큰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을 구성하는 각 오브제들을 살펴보며, 지난 전시의 확장된 맥락임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이번 전시에 대한 더욱 폭넓은 이해를 돕는 거죠.
예를 들어, 아래 사진 속 〈Wallpaper Marilyn〉은 작가가 2012년 공개한 필름 〈Marilyn〉의 세트 중 배경 요소로 등장했던 무늬였습니다. 참고로 비운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마릴린 먼로는 생애 마지막(1950년대)을 대부분 에스토리아(Waldorf Astoria) 호텔에 투숙하며 지냈는데요. 필립 파레노는 당시 그녀가 남긴 메모들과 남겨진 모습들을 연구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호텔 벽지를 그대로 가져와 전시장에 재연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영상작업을 제작합니다. 즉, 가상의 마릴린 먼로의 환영을 초대해 그곳을 부유하며 추억의 장소들을 회상하고, 남겨둔 메모들을 참고해 당시 그녀가 어떠한 기분과 생각을 가지고 그곳에서 생활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작업에서 느껴지지 않나요?
해당 벽에 설치된 등 작품은 레진을 이용해 3D 프린트 기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여기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첫째는 동양적인 관점에서 예로부터 귀신 혹은 환영이 훅 지나갔을 때 초가 흔들린다는 속설이 있듯이, 그 환영을 현장에 데려온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등은 그로피우스 바우가 처음 지어진 당시, 독일 디자이너 Marianne Brandt (1893-1983)가 제작한 조명을 똑같이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벽 한 켠에 자리 잡은 조명이 묵묵히 목격 해온 역사적 순간들을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깜빡임을 통해, 그곳을 거쳐간 영혼들과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살아있는 전시를 선보이기 위해, 전시장 안에 살아있는 이스트(효모균)를 자라게끔 배치를 해두었는데요. 특히나 온도에 예민한 이스트를 창가 앞에 두어 시시각각 달라지는 날씨와 그때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어서 순간적으로 팽창과 수축되는 리듬을포착한 데이터를 프로그램으로 전달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관객들은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등의 깜빡임을 경험하게 되고, 작품 간에 소통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을 알아갈수록, 전시장에 들어와 작품을 감상하는 그 순간만큼은 유일하고, 반복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와닿습니다.
반면 2019년부터 작가는 AI 과학자들과 새로운 협업을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는 리뉴얼을 거치고 재개관한 MoMA 로비에설치된커미션작업을 들 수 있는데요. 모던 아트에 대해 연구하는 취지로 설립된 MoMA(뉴욕 현대 미술관)의 재오픈을 앞두고, ‘앞으로 현대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대한 거듭 고민 끝에, Glenn 관장은 필립 파레노가 얘기하고자 했던 언어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제작된 새로운 시리즈 Echo(2019)는 여러 상징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오픈과 동시에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죠:)
위와 같이 파레노의 작업은 전시장 입구(로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티켓부스에 줄을 선 사람들을 포함해, 화장실을 이용하고, 전시장에 입장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오가는 공공장소이죠. 작가는 천장에 달린 마키(Marquee) 시리즈를 포함해, shutter, screen, moving lamps, brain로 구성된 총 5개의 요소들을 로비 곳곳에 위치시켜 두었습니다.
또한 상단의 오른쪽 사진과 같이, 벽 측면에는 이러한 자신의 몸체를 진두지휘하는 AI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Echo>에서 수뇌부를 담당하고 있는 해당 장치는 코로나로 인해 미술관이 닫혀있는 이 순간에도, 비록자신의 몸체들은 작동하진 않지만, 정작 자신은 길가의 자동차 소음 및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 실내 기온 등의 데이터를 누적해 지속적인 작동을 보이고 있죠(긴 겨울잠을 자고 있는 <Echo>의 현황은 해당 링크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햇빛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과, 바람의 영향을 받아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외부환경에서 수집된 데이터들은 모두 모여 이곳으로 축적됩니다. 그리고는 마치 연극배우들처럼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등을 깜빡이고, 필름에 형체를 드러냈다가, 소리를 내는 등 활발한 대화를 나누며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있죠.
Philippe Parreno, Flickering Lights, APMA, Seoul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 필립 파레노의 Flickering Lights 시리즈는 현재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PMA)에서 진행 중인 소장품특별전(02.23~)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시장 속 사람들의 유입이 잦은 긴 복도를 따라 설치된 파레노의 등 작품을 보면서, 순간 걸음을 멈춰 서거나, 그저 멍하니 그 움직임을 관찰하는 관객들도 보입니다. 이처럼 작가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빛과 소리, 그리고 움직이는 요소들로 관객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저 그 공간에 머물면서 순간순간 변화되는 그 현장을 온전히 즐기며 체험하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오늘은 오랜만에 돌아온 에피소드인 만큼,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던 작품은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하네요.. 그럼 더 자세한 내용은 내일 연재되는 ‘한 점 하실래요?’에서 마저 전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