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대부분 표면적이다. 우리는 미인의 기준을 얼굴에 두지 내면에 두지 않는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사용법을 궁금해하지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상업 미디어와 출판물은 표면적인 것들, 즉 실용적인 것을 다루려 한다. 유사 이래, 흔히 말하는 좋은 직업과 좋은 벌이는 그런 실용을 따라 형성되어 왔다. 즉 누군가 돈을 벌고자 한다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그 역시 관심을 둬야 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ㅡ안타깝게도ㅡ표면적이자 실용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글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인간 내부의 다분히 근원적인 것을 향했다. 간혹 내게 '순수문학이 대체 무엇이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페소아가 쓴 책, 예로 <불안의 서>가 바로 순수문학에 해당한다.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두는 독자는 전체 독자의 양에 비하면 현저히 적다. 애초에 관심 독자가 적다는 것, 그건 이미 태생적으로 그의 미래가ㅡ<불안의 서>에 등장하는 '나'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 때문에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확률적으로ㅡ결정되어 있다는 걸 뜻한다.
'저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대체 왜......' 우리는 그런 의문을 던진다. 그는 돈이나 인기보다는 생명력을 택했다. 내가 지금 의자에 앉아 1세기 전에 쓰인 그의 출판물을 읽을 수 있는 건 그가 당장의 인기보다는 생명력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분법으로 나눠 둘 중 어떤 선택이 더 옳다고 딱 잡아 말하긴 어렵다. 경계선에 걸쳐 앉기 위해선 운도 따라줘야 한다. 어쨌거나 그는 그런 선택을 했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가 쓴 문장을 읽어 보자.
"돌연히, 마치 신비의 아이처럼, 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수탉이 운다. 나는 이제 잠들 수 있다. 왜냐하면 아침이 내 안에 있으니까."(73쪽)
<불안의 서>를 액자 형식의 단편 소설이자 수필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선 산문시라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저 문장을 보라. 꼭 그렇게 보인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기 어려운 시. 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의 의미 없는 선을 볼 때 느껴지는 당혹감이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떠오른다. 이처럼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게 비단 시뿐이겠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것, 제한적으로 밝혀낸 자연법칙 외의 거의 모든 것이 비밀에 감춰져 있다.
당신의 기분도 말하기 전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알고자 하는 건 피곤하고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불길한 예감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정말 불길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기분을 감당하지 싶지 않은 것이다. 불 꺼진 방, 거실의 한구석, 그곳에서 순간적으로 어둠이 손짓할 때,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에 대해서든 마음에 대해서든, 그저 당분간의 안정을 위하여, 우리는 앎의 욕망을 버린다.
우리의 삶은 일상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명료하여 따분해 보일 정도로 뻔하다. 그래서 우리 등 뒤에 달린 태엽을 끊임없이 감아대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예견된 듯한 그 미래가 우리를 우울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우리가 당장 할 일이 없는 걸 두려워하는 건 단순히 무료해서가 아니다. 오늘날 정신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괜한 생각'이 들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는 일에 회의가 들어, 왜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 보니 네가 많이 한가하구나. 바빠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하는데.' 우리는 어둠을 응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관심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런 공간이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으니 유쾌하지 않고, 유쾌하지 않으니 멀리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제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분명히 존재하는 한 공간과 모종의 분위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니 이런 한 개인의 우울한 수필 혹은 산문시에서, 혹은 독백체의 따분한 소설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독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일기는 일기장에나 쓰라고 주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주변의 그런 냉소적 반응에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한 채 죄지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있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을 주변인으로 둔 독자를 위해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을 살짝 바꾸어 다음과 같이 돌려주고자 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말 속에 스며든다는 것은 월등하게 산다는 것이다. 글로 묘사되는 삶이라고 하여 현실성이 희박하지는 않다. 속 좁은 비평가는 이렇게 강조하기를 좋아한다. '애가'풍의 시들은 결국 삶은 '고통스럽다'는 결론 말고는 말해주는 것이 없다고. 그러나 삶의 '고통'을 말 속에 포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고통스러운' 나날은 항상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쓸쓸한' 어휘와 '암담한' 기억 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풍요롭고 찬란한' 바깥세상의 '아름다운' 들판과 하늘에 '시든' 꽃과 별들을, '고통스러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흩날려 버려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