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완고한 측면들
여기, 슬픔에 빠진 한 남자가 있다. 전원주택을 짓기에 앞서 지하수를 파려던 그는 값비싼 돈을 치르는 대신 다우징을 이용해 지하수를 찾으려다가 난관에 부딪혔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운명에 눈물짓는다. 곧 그의 친구가 도움을 주고자 찾아온다. 친구는 사려 깊은 태도로 지하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위로한다. 그는 문득 기운을 회복한다. "그래, 맞아. 겨우 이런 거로 좌절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는 다우징을 다시 잡았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다우징을 거꾸로 잡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는 지하수가 솟구쳐 오르는 상상을 하며 웃음을 흘렸다. 친구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에 안도를 느끼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절망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으며 때로는 지하수를 발견하여 기쁨을 맛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발견은 주사위 던지기와 다를 바 없어서 곧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실패를 마주하고 만다. 이처럼 만일 그가 유사 과학을 신봉한다면 그는 다른 방법으로, 혹은 다른 다우징 막대기를 손에 쥐는 것으로 그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고 결국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를 구해주려면 그가 삶의 토대로 여기고 있는 다우징이 유사 과학에 불과하므로 그런 사유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조언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성공하기도 했던 경험, 다우징으로 물을 발견했던 경험을 언급하며 지금 당장 문제를 겪고 있긴 하지만 그건 약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런 사례를 무척 희귀한 현상이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일례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부모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오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괴롭다고 토로한다. 이들은 아이들의 성격은 물론 인생마저도 부모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양육 전문가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끊임없이 몰아치는 아이 양육의 유행은 또다시 부모를 공포스러운 세계로 몰아넣는다. 아이의 오감 발달을 위해 해야 한다는 온갖 목록과 아이와의 건전한 관계를 위해 해야만 하는 대화법은 마치 그 방법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부모를 몰아간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에게 친 단 한 번의 호통만으로도 필요 이상의 죄책감에 빠지게 되었고, 사춘기 아이와 대화가 잘 안 되면 아이의 모든 말에 정성스럽게 반응해주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스스로 원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자책은 곧 왜 아이를 똑바로 키우지 않았느냐는 부부간의 다툼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신이 이렇게 노력하는 데도 알아주지 않는 아이에 대한 원망으로 끝을 맺곤 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과학적 견해는 아이를 고무찰흙을 빗듯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근거가 매우 약한 신화로 치부한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는 아이들의 삶이 전적으로 환경에 달렸다고 저술하는 책들을 베스트셀러에 올려놓는다. 따라서 아이들의 모든 태도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이런 반박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겠어요? 괜히 베스트셀러겠느냐고요. 어쨌든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이런 책들을 읽는 거고, 이런 책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런 식의 반박은ㅡ그 반박이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떠나ㅡ이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 대답은 진정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게 필요한 건 그저 공감과 위로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답은 '무엇이 잘못되었으므로 이렇게 해보라'는 조언이 아니라, 지금까지 조금 실수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잘하고 있었으며 별문제 없으니 그렇게 계속 나아가라는 위로다. 이는 다우징 사례에서 언급한 남자가 원했던 바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우리 삶에 회한을 느끼고 변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변화의 기회가 오더라도 그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심지어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끼며 분노한다.
이런 식의 분노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행동유전학자들을 향한 대중들의 오랜 비난에서도 그 증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란성 쌍둥이에게서 발견되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지능과 유전이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 행동유전학자들은 즉각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라는 공격을 받곤 했다. 이 현상에 대해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공격들은 그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얄팍하고 정치적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유전자 속에 들어 있다는 거군요?" (...) 유전자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갑자기 이성을 잃고 50퍼센트와 100퍼센트, "어떤"과 "모든", "영향을 미친다"와 "결정한다"를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빈 서판, 2020, 662)
스티븐 핑커는 이런 현상에ㅡ조금 냉소적인 기운이 실린ㅡ'지적 장애'라는 표현을 썼다. 안타깝게도 이런 어려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모든 사람은 남자다"라는 명제의 부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심코 "모든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스티븐 핑커는 사람들이 유전자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이성을 잃고 '모든'과 '어떤'에 대한 구분 능력을 상실한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는 평소에도 그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따라서 나는 '모든'과 '어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지적 장애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수성'의 문제로 본다).
우리 삶에 '너는 잘하고 있다'는 식의 위로나 '누구나 그런 어려움을 겪는다'는 식의 공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가 들려줄 수 있는 테두리 내에서 도움을 얻고 그 도움 덕분에 때로 행복을 느끼지만, 그 테두리가 가하는 정해진 한계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 테두리를 가리키는 사람 역시 곁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껍질이, 우리의 세계가 깨어지는 곳에서 환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을 감지하기보다는 거칠게 튀는 파편을, 갈라지는 자아를, 무너지는 자존감을 발견한다.
환경이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주장은 바로 이런 장면에서조차 그 증거를 드러낸다.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의 주변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떠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완고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을, 특히 아이를 찰흙처럼 빚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선한 의도가 이미 진작에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아이를 올바로 키우기 위한 특정한 양육 방식은 일치된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부르곤 했다. 그 예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부모에게 돌리는 자녀를 들 수 있다. 부모는 자녀의 인생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믿음으로 달렸지만,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그 덕분에 자신의 잘못을 손쉽게 부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잘못을 모두 그에게 돌릴 수 없다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사회 운동은 어느 순간, 환경만 잘 조성해주면 한 아이를 원하는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질되었고, 그 부작용으로 나타난 '끊임없는 남 탓'은 아이들의 삶을 부모가 설계할 수 있다고 여긴 믿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근래의 많은 젊은이들은 결혼을 기피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 낳기를 꺼린다. 이들은 아이를 키우는 데에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이들에게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들에게 더욱 근원적인 조언을 해주는 이들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거나 아이를 온종일 옆에서 보살펴야 한다거나 아이가 뒤처지지 않도록 여러 학원에 보낼 큰돈이 필요하다는 조언ㅡ사실상의 푸념ㅡ에 절여져 있다. 그래서 옆에 아이를 놔둔 채 TV에 집중하고 있는 부모를 보기라도 하면 우리는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고 만다. 그런 상황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부모가 있으면 자격이 없는 사람이 부모를 키우고 있다며 수군댄다. 자녀를 집에 놔둔 채 출근하는 어머니를 쏘아보며 자녀보다 자신의 출세와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둔갑시켜 죄의식을 강요한다. 이런 환경은 많은 예비 부모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고, 결국 잘 키울 자신이 없으니 아이 낳는 걸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부부를 양산하고 말았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낮아진 출산율을 개인주의나 급등한 집 가격의 문제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는 수많은 부주의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해결책들은 뿌리를 건드리기보다는 가지치기나 접목에 집중하고, 그래서 비슷한 문제를 끊임없이 양산한다.
우리는 자녀를 향한 우리의 기대가 너무 큰 것은 아닌지, 아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필요 이상의 공포에 젖어 있는 건 아닌지, 아이들 행동 하나하나에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끊임없이 다루고 만져주는 방식으로 양육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키우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는 길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만일 진정으로 아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틀에 변화를 주는 조언에도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탁아소에서 자라는 아이를 보며 미리부터 혀를 찰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야말로 그 아이를 모욕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영화 '가타카'는 아이의 인생을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하는 DNA 조작의 시대를 다룬 바 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두려워하면서도 아이의 성격과 삶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설계하고 키워낼 수 있다는 양육 방식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아이의 경험을 완전히 통제해야 한다는 독재적 생각에 도달하기 쉽다. 환경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그가 처한 환경만으로 그를 재단하고 있는 우리의 두 눈이다.
따라서 아이의 삶을 부모가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듯 구는 오늘날의 사회에 어른들의 머리에서 잊힌 지 오래된 한 단어를 상기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미래에도 문학이라는 장르가 살아남는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그 단어를, 스티븐 핑커는 '뉴저지에서 온 할머니', 해리스와 인도의 외진 마을에 사는 한 여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내 바람과 상관없이 그건 아이의 운명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