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내와 나는 우리나라가 슬슬 추워지기 시작하는 11월의 초입에 오키나와를 처음 방문했다. 기대했던 대로 11월임에도 우리나라와 달리 따뜻했고 그리 습하지도 않았다. 오키나와가 아열대 지방이라는 걸 알리듯 판다누스와 소철, 왜종려가 늘어서 있었고 나이가 몇백 살은 되어 보이는 수십 그루의 대만고무나무는 줄기에서 나온 기근을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일본 본토인들은 대만고무나무를 '가쥬마루'라 부르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가츠무레'라 부른다. 일본에 속한 지 오래되었으니 용어를 통일할 법도 한데, 오키나와 인들은 대만고무나무에 '오키나와어: 카츠무레'라는 표식을 달아 두고 있었다. 19세기 말엽 일본에 복속되었던 류큐 제도의 주민들은 그들이 '야마토'라 부르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언어를 간직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 다녔다. 교외의 오키나와의 주택은 현대에서 멀리 떨어진 근대의 모습을 풍겼다. 구획으로 정리한 택지가 많아서 식물이 흔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주택의 담과 벽을 넘나들며 그간의 세월을 자랑하는 식물들이 눈길을 끌곤 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수록 그런 곳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산동네라고 깎아내릴 그 공간은 거대한 교목들 아래에서 입체적으로 휘어지며 자연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주택에서 무엇보다 특이했던 건 지붕이나 대문 위에 한 쌍씩 올려 둔 심술궂은 형상의 시사였다. 어디서든 시사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수호 석신인 돌하르방이 있지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지붕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선 우리나라의 잡상과 비슷한데, 잡상 역시 흔하지는 않다. 반면 오키나와의 주택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시사를 올려두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시사를 두는 것일까? 내게 오키나와는 주술의 나라처럼 보였다.
오키나와 나하 시의 골목길
2.
그로부터 2년 뒤, 오키나와 동남부의 신성한 땅 세파우타키를 찾았다. 때는 5월이었다. 오키나와 주민인 츠네코와 미키코가 여행 계획을 세웠고, 나와 아내는 츠네코와 미키코가 번갈아 운전하는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그들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차는 곧 나하 시 동남쪽에 있는 치넨 반도에 들어섰다.
오키나와의 5월은 우리나라의 8월을 떠올리게 할 만큼 무더웠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세파우타키의 매표소로 천천히 걸어가는 단 십여 분만에 온몸이 땀에 젖었다.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어 태양 빛이 너무나 따가웠다. 혹시 몰라 챙겨 온 긴소매 옷이 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세파우타키 매표소엔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딸려 있었다. 우리가 잠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상점을 구경하는 동안 츠네코와 미키코는 표를 구매했다.
세파우타키로 입장하기 전, 입장객들 모두 조그마한 방, 일종의 시청각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 세파우타키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아쉽게도 설명은 일본어로만 진행됐고 내부의 조그만 선풍기는 더위를 달래기에 부족했다. 그래도 입장객들은 설명에 집중했다. 일본어를 모를 것 같은 서양인들도 표정만큼은 꽤 진지했다. 입장객들의 태도엔 단순한 기대로 치부하기 어려운 경외가 서려 있었다. 큰 소리로 웃거나 떠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여행객들의 들뜬 기분마저 가라앉힌 게 아닌가 싶었지만 세파우타키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 시원했다.
세파우타키의 안쪽 깊숙한 곳, 커다란 암석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는 거대한 암석 통로를 지나자 덤불 너머 먼 곳으로 구다카 섬이 보였다. 류큐 왕국 시절,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곳에 서서 신의 섬이라 불리던 구다카 섬을 바라보며 바다 너머에서 온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구다카 섬은 세파우타키의 동쪽에 있어 이른 아침이면 구다카 섬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다. 바로 저 덤불 너머로 말이다. 세파우타키가 오키나와 성소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된 것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구다카 섬이 보이는 세파우타키의 성소
3.
프랑스 저명한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가 세파우타키를 방문했을 때 오키나와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중국해의 헤로도토스>라는 글에 오키나와 주민들이 세파우타키에 가려는 자신을 독뱀이 너무 많아 위험하다는 이유로 만류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세파우타키를 방문했을 때는 독뱀의 위험이 전혀 없었으니 시절이 많이 변한 셈이다.
또 그는 같은 책에서 류큐족의 모든 종교 생활은 여성들의 손에 달려 있었고 초자연과의 관계에서 특권 또한 여성들에게 있었다고 썼다. 남성은 의식에서 배제되었고 제사에 쓰고 남은 음식을 맛볼 수도 없었다고 했다. 우리의 전통 제사와 비교하면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셈이다. 당시 남성의 역할은 무녀에 대한 의무, 즉 물고기를 잡아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세파우파키에는 내부의 중요 장소마다 그림을 첨부한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그림엔 머리띠를 둘러맨 여러 무리의 남성이 그려져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설마 레비스트로스가 틀렸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그들은 남성이 아니라 머리를 묶어 뒤로 올린 여성인 것 같다. 다른 안내판에는 나이가 지긋한 한 무녀가 젊은 무녀의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는데, 이 나이 많은 무녀 역시 머리를 뒤로 올려 묶고 있었다. 그림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혹은 오키나와의 문화를 잘 알지 못하면 이들 그림의 등장인물들을 남성으로 착각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결국 상당수 외국인은 제사에 있어서 오키나와가 여권 중심 사회였다는 특이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세파우타키에서 구다카 섬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에서 구다카 섬의 중요성을 눈치챌 수 있다. 오키나와의 전설에 따르면 무척 신령스러운 장소임이 틀림없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시조인 아마미코 여신이 나타난 곳도, 전령사 신들이 다섯 종류의 곡식을 싣고 나타난 곳도 바로 구다카 섬이었다. 조선 시대 왕실이 중국의 천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듯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신들이 처음 나타났던 구다카 섬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다. 레비스트로스는 구다카 섬에서 무녀 입문 의식이 치러진다는 주민의 말도 적어두었다. 그때가 1983년이니 지금도 그런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4.
레비스트로스가 남긴 글을 읽다가 문득 오키나와의 세파우타키를 떠올리게 되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직접 세파우타키를 가보지 않았다면 레비스트로스의 글을 읽으면서도 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을 테다. 설령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의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았다면 난 사진과 글을 보며 사전적 정의나 더듬거렸을 테다. 사실 이방인에게 세파우타키는 수목이 울창한 언덕일 뿐이다. 이곳의 신사와 예배소엔 인공적인 건축물이 없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지붕도 없고, 전망 좋은 곳을 골라 세워둔 누각도 없다. 이곳의 예배소는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 둔 바위 아래에 있다. 만일 신과의 교감이, 매개자의 영적인 감각이 정말 중요하다면 이보다 더 알맞은 장소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키나와, 난 그곳을 생각하며 문명과 동떨어진, 세속에 물들지 않은, 주술과 같은, 경건한 무언가를 떠올린다. 어쩌면 당시 함께 있던 사람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츠네코, 미키코, 잠깐 만났던 무츠미, 무엇보다도 나의 아내. 아직도 그곳의 나는 이끼와 덤불로 뒤덮인 담벼락을 지나 낡은 돌계단으로 굴러떨어지며 증발하는 오래된 적막에 휩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