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꿈꾸는 선사시대의 기억

by 김영욱

밤에 덜 울기 시작한다는 '100일의 기적'지나 잠을 푹 자기 시작한다는 '돌'까지 넘겼지만, 아기는 새벽마다 꼭 한 번씩은 깨서 한바탕 울기를 반복했다. 아기는 마치 연착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무정차 통과하는 법은 없는 공용 버스나 부부의 권태기 혹은 인생의 정체기처럼 때론 조금 빠르게, 때론 다소 늦게 밤의 울음을 시작했다. 이번엔 새벽 세 시였다. 건넌방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선사시대에도 아기는 지금처럼 울었을 것이다. 그때의 일을 정확하게 알아내긴 어렵지만, 인간의 본능적 성향이 현생 인류가 시작된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아기는 모두가 자는 그때에도 갑자기 깨어나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리곤 했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선사시대의 부모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다른 육식동물보다 형편없이 약한 육체 능력을 지녔던 선사시대의 인간에게 아기의 울음은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아기의 울음은 우렁찬 법이고, 그 울음은 주변을 배회하던 포식자들의 주의를 끌 가능성이 있었다. 선사시대의 부모들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아기의 울음을 재빨리 멈추어야만 했을 테다.


선사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은 선사시대의 부모가 현대의 부모들보다 아기들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았으리라는 결과를 내놓곤 한다. 선사시대에는 모두 함께 잠을 잤기에 아기의 울음은 공동체 전체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때에는 동굴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아기의 울음이 어떻게 들렸을지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포식자의 주의를 끌 우려가 컸다. 그렇기에 선사시대의 부모는 아기가 울면 울음을 멈추도록 재빨리 돌봐주어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큰 지지를 얻고 있는 아기 양육법, 즉 아기가 이유 없이 울면 스스로 울음을 멈출 때까지 놔둬야 한다는 믿음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그때에는 아기를 그런 식으로 키울 수 없었다.


또 학자들은 선사시대 부모들이 아기를 숲이나 동굴에 혼자 놔두는 것이 아니라 생후 최소 몇 년간 자신의 배나 등에 아이를 단 채 함께 생활했으리라는 추정을 했다. 그런 추정은 현존하는 수렵채집인과 유인원 연구를 통해 충분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처럼 선사시대의 부모들은 아기를 혼자 놔두거나 울어도 모른 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우위를 점하고 있는 육아법, 즉 아기가 보채더라도 쉽게 달래 주지 않는 방식을 따르는 현대의 부모들보다 아이들과의 친밀감 형성에 있어 훨씬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연구들은 현대의 육아법이 선사시대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결과를 내놓는다. 현대의 육아법은 독립심과 극기심을 기르는 데 좋을지도 모르나ㅡ이조차도 명확하지 않다ㅡ부모와의 친밀감 형성에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를 진행했던 미국의 심리학자 나바에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어린 시절에 감정적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따뜻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연민과 같은 감정이 없습니다."


서양의 부모는 아기를 대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일상의 접촉에서도 분리적인 방식을 택하는 편이다. 아기 침대, 카시트, 유모차, 단절된 방. 그런데 어른과 아기가 따로 잠을 자는 관행은 미국에서도 겨우 200년 전에 시작되었을 뿐이다. 서양, 특히 미국과 영국의 부모들은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단절이 아이의 생리와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가 계속되자 동양의 전통적인 아기 양육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아기와 자주 접촉하자는 것이었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고,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다니며, 칭얼거리면 바로 다독여 주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의 부모들은 서양, 특히 유럽의 지난 교육법을 따라 하려는 경향이 짙은 편이다.


예전에 아기와 함께 서울 도서관에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아기를 도서관 바닥에 내려놓자 아기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벽을 짚으며 일어섰다. 주위의 아이들은 아기에게 호감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많아야 초등학교 4학년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오도카니 서 있는 14개월 차 아기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처음엔 표정으로, 그 뒤엔 직접적인 말로. 난 얼른 아이를 내 품에 안았다. 난 그 어린아이가 품고 있던 적개심을, 자신보다 훨씬 더 어린 아기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적의의 정체를 생각해 보았다.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성장하도록 교육받은 아이는, 부모의 품에서 떨어진 채 홀로 울음을 그치기를 강요받은 아이는 남의 도움 없이 의젓하게 커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연민이 없는 차가운 마음을, 너 역시 나처럼 강해야 한다는 독선을 가슴 한쪽에 키울 수 있다. 터부시되는 이타주의와 이상화된 개인주의. 오늘날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한 데다가 인터넷상의 비난과 조롱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너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그런 반응이 당연해 보일 지경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너를 비난하고 심판할 권리가 있다고.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기는 울었다. 밤이 되면 더욱더 서럽게. 난 우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 거실로 나왔다. 아기는 이동 중에 잘 울지 않는 편인데, 그 움직임을 급히 어딘가에 숨어야 하는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기 자신도 조심하게 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작은 거실을 까치걸음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며 아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계속 울면 주변에 있던 늑대가 찾아와 모두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어쩌면 호랑이가 아닐까?"


그러나 아기는 선사시대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면 내 까치걸음이 그다지 급박하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만 것일까? 마치 현대에는 현대에 맞는 어쩔 수 없는 육아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부모들의 고통스러운 울음처럼, 아기는 그렇게 한참 더 울고 나서야 어른들에게 여전히 비밀인 채로 남아 있는 그들만의 꿈꾸는 세계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되돌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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