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 그르니에가 쓴 <보로메의 섬들>을 읽었다. 처음 읽는 건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읽어 보았지만 내용은 어렴풋했다. 보로메 섬이 어디에 있더라? 난 다시 한번 알아본다. 그래, 이탈리아 북서부 호수에 있는 작은 섬이었지. 문득 이탈리아 북부 호수에 관한 글이 떠오른다. 그 기억도 어렴풋하다. 간신히 하나를 기억해 낸다. 괴테가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가르다 호수를 찾았을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기억은 온데간데없다. 이탈리아 호수에 관한 글을 더 보았던 것 같은데. 아직도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움베르토 에코가 언급했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이야기하는 걸 옆에서 들었던 걸까? 이탈리아 북부의 4대 호수와 미국 북부의 4대 호수를 대비해 가며 설명한 글을 읽은 적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2.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바닥에 누운 채 나를 들어 올려 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발을 내 배에 대어 공중으로 들어 올리면서 그 행위를 비행기 타는 것에 묘사하곤 했다. "이번엔 미국으로 가볼까?" 덕분에 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미국에도 가보고 중국에도 가볼 수 있었다. 난 분명 즐거워했고, 내가 보기엔 아버지도 그랬다.
내가 아이의 몸을 두 손으로 잡아 내 머리 위로 추켜올리는 순간 그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누군가를 들어 올릴 때, 누군가가 나를 들어 올려주었던 그 기억이. 사실 아버지가 비행기 태워주던 게 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내가 바라본 아버지와 내 동생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TV 어디에선가 본 것을 내 경험으로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기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잊고 있던 오래된 상자 속 바랜 종이에 적어둔 메모처럼 우연히. 메모는 사실의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지만, 내 머릿속 기억은 나 외엔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럼 그 기억이 맞는지 직접 여쭤볼 수밖에. 그때 아버지가 제게 그랬었나요? 그럼 아버지는 슬몃 미소 지으며, 맞아 그런 적이 있었지, 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을 TV에 고정한 채, 글쎄다, 잘 모르겠는데,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아버지에게도 기억은 희미하기만 한 것이 분명할 테니.
3.
겨울밤 거실 구석에서 타오르는 화로에 빛이 퍼지고 그 빛은 다빈치의 스푸마토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내 삶은 중세의 세밀화처럼 모든 곳에 빛이 퍼져 있지 않다. 이아생트의 집에 등불이 켜지면 에피파니의 현장이 나타나지만 그 빛은 멀리 가지 못하니, 그저 그곳에 빛과 어둠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다른 곳은 어둠에 잠겨 있지만 나는 오직 밝은 부분만을 바라본다. 아니, 때로는 그저 어두운 부분만을. 빛이 있기에 더욱 움츠러드는 그 어둠을.
오늘도 기억은 빛의 세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