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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정 May 27. 2024

다른길

세상 모든 길은 자기에게로 이르는 여정

낯선 풍경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 길이 시작된다

길은 대체로 멀다. 먼 것일수록 더 매혹적인 까닭이다. 오래 걸을수록 집은 더 멀어진다.


 “집 달팽이 신세 같아” 자조할 만큼 이사가 잦았다. 집을 등에 지고 길 위를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매번 장기 거주를 희망했으나 직장과 학교의 변화로, 건강 문제로, 예상치 못 한 집의 결함으로 오래지 않아 짐을 싸곤 했다. 이고 지고 길을 나서는 걸음이 고달팠다. 정주定住는 요원한 꿈으로만 보였다.


이 도시는 처음부터 거주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별다른 기대 없이 도착한 곳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선물이 찾아왔다. 자연 속에 조성된 주거지에서 화창한 기분으로 맞이하는 아침이 이어졌다. 떠돌던 자의 부유하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나는 유유자적한 산책가가 되어 보기로 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지리를 익히고선 내키는 대로 큰길, 골목길, 호수공원, 산등성이를 누볐다. 숲을 배경으로 펼쳐진 호수공원은 세련된 조경과 풍성한 색채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발길 쌓인 길과 장소들이 나만의 지도를 그려내는 동안 몇 켤레의 신발창이 닳았다. 익숙한 경로의 3차원 공간 전체가 집안만큼 편안해졌다.


행복할 때 시간은 몇 배로 빨리 흐르는 모양이다. 떠날 날이 훌쩍 다가온 지금, 더 자주 더 오래 걷는다. 떠나기 싫어서, 미지의 세상이 새삼 두려워서

마음이 요동친다.




그날은 공기부터 특별했다. 

며칠 바람이 불고 간 덕분인지 미세먼지가 말끔히 걷혔다. 하늘이 청유리처럼 빛났다. 쑤시던 발목도 한결 가뿐했다. 기상 앱 열어보지 않아도 틀림없는 고기압일 것이다. 선선한 기온까지 더해져 요즘 만나기 어려운 진귀한 날씨였다. 서둘러 운동화를 신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이어폰이 없었다.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 재생목록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것이 산책을 시작하는 루틴인데, 주변 소음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방어무기를 빠뜨리다니! ‘올라갔다 와야겠지?’ 망설이는 찰나, “어서 뛰쳐나와 봐!”, 그날의 남다른 하늘과 공기가 재촉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나는 성큼 밖을 향해 유리문을 밀쳤다.

  알몸으로 외기外氣에 노출된 두 귀속으로 날 것 그대로 소리가 밀려들었다. 도로 위 차들이 유난스러운 소음을 내며 달려갔다. 자전거가 벨을 쩌렁대며 아슬하게 옆을 스쳤다. 아이의 양손 나눠 잡은 젊은 부모들 웃음소리, 짝지은 연인의 두런두런 속삭임이 또렷한 자음과 모음으로 날아왔다.

  귀가 열리니 시각 또한 파노라마로 확장됐다. 길을 메운 사람들, 곱게 화장한 여자들, 유행인 듯한 주름치마와 파스텔 빛깔 트렌치코트 자락들이 팔락거렸다. 인도와 차도 곳곳 화단에서 원색의 꽃들이 쨍하게 빛났다. 주말의 거리가 온통 살아 들썩이고 있었다.

  한 자락 바람이 불어와 부드럽게 몸을 안아주고 갔을 때 알아차렸다. 봄이었다. 호수로 향하던 발걸음이 주춤하더니 한가지 충동이 일었다. ‘경로를 이탈해 보자’. 이제껏 밟아 본 적 없는 낯선 길들이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길로 갔다. 

갈림길을 만나면 한적한 쪽을 택했다. 외계外界가 적막해지자 밖으로 뻗쳐있던 오감이 내부로 잦아들었다. 온몸 무게를 떠받치는 동시에 땅을 힘차게 누르는 두 발바닥, 아파오는 종아리, 가빠지는 숨소리, 서서히 배어 나오다 이내 축축해지는 땀.


낯선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정문 오른쪽 언덕 비탈을 나무 계단이 구불구불 휘감고 있었다. 계단 끝까지 올라가니 오솔길이 나타났다. 좁은 숲길을 몇 분 동안 걸었다. 한순간 시야가 트이며 너른 잔디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숨도 따라 확 트였다.


원형 잔디공원의 지름을 관통해 걸었다. 이번에는 이국적 풍경이 등장했다. 아찔한 키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양옆을 도열한 가로수길 끝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펼쳐졌다. 클라이밍 인공암벽과 놀이기구가 즐비한 광장이었다.


신세계를 본 것 같았다. 그리 멀지도 않은, 광활한 풍경의 존재를 이제껏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안온함에 마냥 젖어 있느라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선 밖이 궁금하지도 않았던 거다. 그러느라 나는 이것들을 놓쳤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간다. 오늘에서야 발견한 풍경의 사계를 미처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 새로 피었던 꽃과 저 혼자 내렸던 비, 낯선 나무와 다른 빛깔의 낙엽들이 미지의 과거로 남겨질 것이다.       


미련과 아쉬움을 애써 떨치며 계속 나아갔다. 놀이광장 둘레에 배치된 팻말의 이름들을 일일이 읽으며 걸었다. 하나의 팻말마다 하나씩 샛길들이 딸려 있었다. 손가락 화살표가 가리키는 미지의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이 화살표들은 또 어디로 나를 데려다줄까.” 상상하노라니 익숙한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 단골 코스인 호수공원으로 가는 지름길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50미터쯤 떨어진 팻말에 새로운 호수 이름이 등장했다. 순간 기억났다. “그래, 이곳의 호수는 두 개였지!”


한동안 지도를 들여다보던 무렵에 오늘 발견한 풍경의 이름들도 분명 보았을 것이다. 익숙한 호수 등 뒤에 또 다른 호수가 존재한다는 것 또한 인지했을 것이다. 보고 알았으되 뒤돌아 이내 잊어버린 것이다. 두 호수는 자매처럼 모양마저 닮았다. 지름길로 가면 도보 10분 남짓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다른길, 다른길로만 이어진 우연한 산책이 이곳에 데려다주었다. 먼 길을 에둘러서 나는 비로소 여기 도착했다.           




하나의 호수 등 뒤에 또 하나의 호수가 있다. 


닮았던 둘은 이제 닮지 않게 되었고 익숙한 호수 주위로 고층 건물과 백화점이 들어서며 날로 휘황해지는 동안 다른 호수는 처음 모습 그대로 그냥 있었다. 주인공 등 뒤 드리워진 배경으로, 인테리어 하지 않은 빈집으로,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로, 헛헛하게 먼 산을 응시하는 자의 옆모습으로. 찬란한 조명도 없는 이곳에 어둠 내리면 황급하게 인적마저 끊길 것이었다.









“대신 생명들로 분주하여 에너지 가득한 세계 하나가 어두운 수면 아래 피어날 거야”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먼 길을 돌아 도달한 존재의 뒤편, 

이토록 가까우나 어쩌면 가장 발견하기 힘들었을 지점에 서서 나는 오랜 헤맴 끝에 자기 등을 발견한 순례자의 마음이 되었다.     


치장 벗고 고요한 등 뒤의 내가 ‘혼자이되 외롭지 않노라.’ 속삭였다. 어둑해진 호수의 일렁이는 표면 위로 한 말씀이 떠올랐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타자他者의 망각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가 여기를 떠나도 다시 까맣게 잊어도 다른 호수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나의 배면背面도 그러하다. 


그리움을 품은 채 이곳을 떠나는 날, 두려움 없이 다시 짐을 싸려 한다. 이사가 운명인 집 달팽이에게 길은 곧 집이다. 


기억할 것이다. 정주할 집은 이미 자기 등 뒤에 있다는 것, 

세상 모든 다른 길이 종국엔 자기에게로 이르는 여정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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