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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정 Mar 13. 2022

그네를 타다

휘익, 그네 한 바퀴 돌아내니 한 세상이 지나갔다.

그 시절엔 동네마다 하나쯤 있었다.

호리낭창 유연한 몸에 힘 좋고 기술 좋아 누구보다 높이 날아오르는 아이, 그네 챔피언 말이다.

흐름에 몸을 맡겨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감각을 지닌 이들이다.

두려움을 다잡아 자기를 밀고 나가는 배짱의 소유자들이다.


그 날의 광경을 기억한다.

열 살 남짓 되는 상급생 하나가 눈을 의심케 하는 360도 회전묘기를 펼쳐 보인 것이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겨를없이 관객들은 입만 떡 벌리고 있었고

고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손목을 털며 자리를 떴다.

저녁밥 짓는 냄새에 홀린 듯 아이들도 하나둘 사라져갔다.


구석에서 기웃대던 나는 비로소 빈자리가 된 그네에 다가가 슬그머니 앉아보았다.

오락가락, 흔들흔들. 초보의 그네가 서툴게 비틀거렸다.

  

엄마 지청구에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대문 밖을 서성이던 날이었다. 골목 끝 놀이터, 거기 그네가 있었다. 삐걱삐걱 목이 쉰 그네가 ‘괜찮다괜찮다’ 달래주니 속울음이 잦아들었다.

연거푸 동생들을 맞느라 엉겁결에 맏이가 된 내가 잠시 요람 속 아기가 되어보는 시간이었다.


연습을 거듭하여 당당하게 그네 위에 설 수 있게 되자 오르면 하늘이 손에 잡히고 물러서면 땅이 일어섰다.

그네 배우기는 몸 전체로 호흡하는 법을 연마하는 것과 같다. 도약의 시점과 내려와야 할 때가 있다.

언제 허리와 배를 내밀며 호기롭게 튕겨야 하는지

또 어느 지점에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빼야 하는지 알고 나면

그네는 두 공간을 오가는 자유로움이 된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었다.     

  

                                                                           

세월 지나 다시 그네에 마음을 의지하는 날이 왔다.

30대 중반을 향해 가던 늦봄,

외할머니 상을 치르고 돌아온 주말 아침이었다.

동네 뒷산 체육공원에서

바스라질듯 낡은 나무 그네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이끌리듯 다가가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 이제 안 아파요? 할아버지 만났어요?”

대답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을 거듭 올려보냈다.



장례미사 내내 외할머니 목소리가 자꾸 귓가를 맴돌았던 일이 며칠째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잘 되얐다, 다 잘 되얐다.”

잔칫날인 듯 목소리는 흥겨웠다.

내 무의식이 만든 환청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떠나는 외할머니가 자신의 生에 주는 작별인사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당신 삶도 이 장례식도 다 잘 되었다고.     


외갓집 근처에서 보낸 짧은 유년이 외할머니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때 당신은 저고리치마 차림에 은비녀로 머리를 쪽진 단호한 성정의 여장부였다.

우리 엄마를 벌벌 떨게 하는 엄마의 무서운 엄마이기도 했다.

또한 내 든든한 뒷배였다.

그 3,4년 외에는 국토의 반대편 끝으로 떨어져 살며 대여섯 번 만난 것이 추억의 전부이다.


몇 마디 대화 몇 장면의 편린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유난히 새카만 쪽머리가 세련된 은발 커트머리로 변하는 동안

외할머니 얼굴 또한 세상만사를 품을 듯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등허리가 점차 굽어졌는데 앞이 아닌 뒤로 재껴지는 특이한 자세가

굽힘 없는 당신 성정답다 생각한 적도 했다.


내 스무살 무렵에는 예고 없는 깜짝방문이 있었다.

좌절 속에서 내가 입을 다물어버린 즈음이었다.

외할머니는 며칠간 엄마 살림살이를 꼼꼼히 살펴보고 아침이면 신문을 오래 읽는 무심한 일상을 보냈다.

그리곤 떠나는 날 아침 비로소 한 말씀을 건넸다.

“내 애기, 기죽지 마라, 암것도 아녀.”

다음 해 좋은 소식을 들고 외갓집을 찾아가던 길,

온밤 꼬박 새우며 덜컹거리는 밤기차 안에서 비로소 알아차렸다.

위로 한마디 직접 전하려 고된 여정 마다 않았던 당신 마음.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장면은 외할아버지 장례에서의 당신 뒷모습이다.

시종일관 낭랑한 목소리로 재래식 장례의 대소사를 지휘하던 외할머니는,

산에 올라 하관을 하고 마침내 봉분이 완성되자 벼랑 끝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곤 위태롭게 하늘을 우러르며 섰다.


“재순아~ 재순아~ 재순아~” 한평생 벗이었던 이름.

목놓은 초혼이 하늘에 가득 찼다.

“잘 가거라~”  온 몸 기운 다 토해내며 하직인사가 이어졌다.

화답하듯 메아리가 하늘에 가득찼다.

차마 헤아릴 수 없었다.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 무너져버린 한 집안의 비극, 내외가 짐을 나눠지고 넘어온 환난의 굽이굽이를.

자신 또한 성치 않은 노구로 반려의 간병을 오롯이 감당한 마음 또한.

다만 나는, 흐느끼는 당신 등을 멀찌감치에서 한참 바라보았다.      


모계사회였다면 가족의 지휘봉은 장녀상속에 따라 외할머니와 엄마를 건너 나에게,

나중에는 나의 딸에게 전해졌을 거라는 공상을 하곤 한다.

우리 4대는 각자 친탁하여 타고난 외모, 성격, 식성까지 판이하다.

그럼에도 초년의 고난, 버텨낸 끝에 기어이 일어서는 인생그래프가 묘하게 닮았다.

그래서 내림이라는 말을 듣는다.


지난 십여 년간 아버지를 간병하며 신앙생활에 매진하는 엄마의 모습에 외할머니의 70대가 투영되어 있다.

노년으로 갈수록 마음의 영토를 넓혀간 외할머니 존재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내 ‘믿을 구석’이다.

사후에도 여전히 짱짱한 뒷배로 남아있는 당신.


영혼이 이승을 떠날 때 마음 에너지가 땅에 남겨진다고 누군가 말해주었다.

마음 에너지는 강해서 오래가고 멀리 간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들은 후론 대를 이어 전해지는 마음의 힘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힘 쎈 마음이 이승 저승의 경계를 능히 오가는 모습도 그려본다.

거기 있는 당신과 여기 있는 나, 다르되 다르지 않을 두 세상, 그네를 타듯 말이다.      



살다가 가끔 그네를 타고 싶은 날이 있다.

‘괜찮다’ 위로가 필요한 밤,

집 앞 놀이터에 나가본다.

그네 위에서,

하늘이 다가오면 별에게 길을 묻고

땅이 가까워지면 숙여 내 안을 들여다본다.

언제쯤 능란한 자세로

자유자재한 그네를 탈 수 있게 될까.




휘익, 그네 한 바퀴 돌아내니 한 세상이 지나갔다.


하나의 생애가 죽음으로 완성되던 날,

아찔한 곡예도 겪어보니 별일 아니더라고,

다 잘 되얐다, 명랑한 마침표찍고 훌훌 손 털며 떠난 사람이 있다.

그네에 앉으면 자기 生에 당당하려 애쓰다 간 한 영혼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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