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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정 May 25. 2024

주기도문의 門

生은 지웠다 다시 쓰며 길게 이어지는  한 문장의 기도문이다.

아마도 거기가 내 꿈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졸린 눈 비비는 어린 신자들을 맞아주던 예배당.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오르면 함박웃음 짓는 전도사님 반쯤 벗겨진 머리 뒤에서 초록색 첨탑도 반짝이며 인사하던 그곳. 

 지하 1층 어린이실 흑갈색 마룻바닥에 앉아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바로 옆 조리실에서 갓 지은 밥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풍금 반주하는 영이언니에게선 복음성가도 배웠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언니 목소리는 먼 종소리처럼 아늑했다.


꿇은 무릎, 겸손한 허리, 모은 두 손, 감은 두 눈.


이 네 가지 자세가 전도사님께 배운 기도의 정석이다. 다음으론 <주기도문>을 배웠다. 무려 2000년 가까이 전해져 온 기도문이라고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거듭 따라 읽기를 몇 주일, 다 외운 아이들이 차례대로 줄을 서 알사탕을 받아먹었다. 

  

나는 한 대목에서 매번 가슴이 떨렸다. <하늘나라가 땅 위에 내려와 하늘의 뜻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처음 듣는 신기한 말이었다. 그곳은 얼마나 황홀한 곳이기에 옛날 옛적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소원하는 걸까. 어쩌면 내일이라도 당장 도착할 것만 같은, 상상 너머의 세계. 그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했다.  


생각과 바램을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면 직접 대답해주시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론 매일 밤 그분께 말을 걸었다. “밤하늘 어느 별이 하늘나라인지 알려주세요, 하늘나라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아홉 살의 기도는 수다스러웠다. 목화솜 이불을 덮고 누우면 머리 속에 그려졌다. 내 주기도문이 곧장 하늘나라까지 올라가고 별나라 누군가의 기도는 땅으로 내려오는 광경. 그리하여 완성된 내 꿈은 하늘  과 땅이 하나로 연결된 세상이었다.  


키가 하루하루 자라났다. 하지만 나의 기도는 자라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늘에 닿지 못한 것 같았다. 소문과 달리 하나님은 원체 과묵하신 걸까. 어떤 응답도 내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응답이란 건 산타클로스 동화처럼 만들어진 허상일지 모른다고 의심이 싹텄다. 


십대의 까칠해진 시선 앞에 불의不義한 세상이 펼쳐졌다. 아픈 것들의 비명에 귀가 먹먹했다. 기도 대신 질문이 시작됐다. 땅은 왜 고통스러운 곳인지, 언제까지 당신은 지켜만 보실 건지, 어쩌면 이곳은 버려져 잊혀진 게 아닌지. 반향 없는 자문자답 끝에 나는 초록첨탑의 세계를 떠났다. 

 

동화가 끝난 자리, 어른이 되려면 배워야 했다. 머리도 심장도 차갑게 살아내는 법. 고개를 오르고 산을 넘는 세월을 만났다. 무릎 꺾여 주저앉는 날도 왔다. 오래 쓰러져 있던 차가운 어둠 속에서였다. 노래 한 소절이 바닥으로부터 떠올랐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느냐”. 영이 언니였다.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년에 있다고 했던가. 영이언니 목소리가 낡은 시간우물로부터 ‘기도의 정석’이 길어 올렸다. 대나무 마디를 한 칸씩 관통하듯 지난至難한 시간 속에서, 오래전 배운 기도의 방법론이 한 단어 한 구절씩 해체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재구성되었다.     

 

삶은 내게, 먼저 꿇어 엎드리라 명령했다. 바닥까지 몸을 낮춰보면 알게 된다. 자기라는 껍질의 비루한 실체. 좁고 굴곡진 골짜기를 통과하려면 켜켜이 두꺼워진 껍질 벗고 맨몸이 되어야 한다. 가끔 기어가야 할 때도 있다.


기도는 또한 모은 두 손이었다. 길 가다 혼자 넘어진 이에게 도움과 위로는 어디서 오는가. 두 손바닥으로 짚고 일어서는 것이 그의 도움이다. 수고한 제 왼손을 자기 오른손으로 잡아주는 것이 그의 위로이다. 모은 두 손에 산산이 깨어진 마음을 담아 다독여 보라. 체온 실린 손길에 도마뱀 꼬리가 재생하듯, 마음이 다시 살아 지저귀며 노래하는 날이 오기도 한다.


눈을 감아 어지러운 色色의 형상을 차단한다. 그러면 암막 너머로 燈 하나 켜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 당신은 감은 눈 속에서 새롭게 눈 뜰 수 있다. 상징과 은유의 베일을 걷으며 세계가 말간 맨얼굴을 보여준다.


정좌한 자세는 단정한 기다림과 닿아있다. 기다리는 자의 묵묵한 숨소리가 살아있는 것들의 비명과 공명한다. 알게 된다. 아픈 것은 나 혼자가 아닌 것을. 도처에서 상처입은 것들이 소리 지를 때, 넉넉한 위로의 품도 전능한 치유의 손도 지니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서 초라한 두 귀를 세상에 내어 주었다. 그저 들어주는 귀만 있어도 울던 아이는 스스로 잦아들지 않던가.


어떤 날의 기도는 별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방향 잃어 막막할 때 하늘로 눈 들어 보라. 멀리 한 곳에 붙박힌 별빛이라야 의지할만한 나침반이 된다. 먼 별에 방향을 물으며 땅 위의 한 걸음을 내디뎌 보는 것과 같이, 믿으며 일단 가보는 거다. 매번 길을 찾아 집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라 해도 바라볼 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바라본다. 문이 열릴 때 그것은 밖을 향해, 또한 안으로도 열리는 것을. 기도는 저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가는 동시에 기도하는 이의 마음속으로 내려가 말을 거는 것을. 응답은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 기도하는 자의 마음속에서 먼저 올라오기도 한다. 매 순간의 호흡, 오늘의 뜨는 해, 지새는 밤, 일그러진 외마디 비명, 가슴 치는 울음, 모두가 다른 표정의 응답일 수 있다. 


생각한다.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 간간이 아이들의 웃음소리, 지나치며 건네는 무심한 인사 속에 대답이 들어 있다고. 최초의 기도가 올려지기 전, 세상은 이미 신의 응답으로 가득 메워져 있던 거라고. 2000년 동안 소망한 하늘나라는 처음부터 이곳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알아채지 못하여 오래 숨죽여 장막 덮고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한 말씀만 하소서” 간구하는 아홉 살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껍질 한 장만 벗겨내면 여기는 또 하나의 하늘나라란다. 슬픔을 들어주는 귀, 상처를 들여다보는 눈, 흐느끼는 등을 쓸어내리는 네 손이 열쇠일지 모른다. 세상을 여는 열쇠는 동시에 하늘의 문도 열 수 있단다.”     

 

여러 겹 시간 틈 사이로 얼핏 보인다. 어린이실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주기도문을 외며 가끔 허리를 곧추세우는 한 아이. 여전히 서툴게 자주 넘어지며 그때마다 나는 기도의 자세를 고쳐 배운다. 어떤 생애는, 무수히 지웠다 다시 써 내려가는 길고 긴 기도문이 된다. 


아무리 멀어 보여도 하늘땅은 고작 하룻길이라며, 과묵하셨던 나의 하나님이 껄껄 웃으신다. 기도 속으로 열린 하나의 門, 그 문을 통해 가장 높은 하늘이 내게 부지런히 오시는 중이시다


# 2024 계간 에세이문학 봄호  <젊은 작가, 클릭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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