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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창건 450주년 기념 학술대회 두 번째

by 소봉 이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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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퇴계선생 서각 작품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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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문(幽貞門)은 도산서당으로 들어가는 사립문을 유정문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이 문을 여닫으며 수많은 손님과 제자를 맞이하고 배웅했다. 마당은 좁고 건물은 이외로 작고 아담하지만, 마당 건너편에는 선생이 좋아한 매화나무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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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 마당 한편 동쪽에는 <정우당(淨友塘)>이란 작은 연못이 있다. 세상이 혼탁하더라도 청렴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주자의 관서유감이 떠오른다.


觀書有感(관서유감)

半畝方塘一鑒開 (반무방당일감개) 작은 연못이 거울처럼 펼쳐지니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일렁이네.

問渠那得淸如許 (문거나득청여허) 묻노니, 연못의 물은 어찌 이리 맑을까?

爲有源頭活水來 (위유원두활수래) 어딘가 맑은 물을 보내주는 샘이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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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당 건너편 동쪽 기슭에 <절우사(節友社)>라는 동산이 있다. 매화와 소나무 국화와 대나무 정원이다. 매화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맑은 향기와 함께 봄을 제일 먼저 알린다. 소나무는 어려운 조건에도 항상 꿋꿋하다. 국화는 늦가을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고 꽃을 피워 향기를 낸다. 대나무는 뿌리가 단단하고 마디가 곧다. 절개를 지키며 검소하게 살아가려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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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숙료는 학생들이 머물고 자는 방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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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도산서당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강 입구에 있는 곡구암이고, 하나는 도산서당 문인 유정문이다. 곡구암 자리는 안동댐 건설당시 매립하여 현재 도산서원 광장으로 조성되어 강 입구에 표석만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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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대는 도산서원 양쪽 기슭에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이 산기슭 동쪽 절벽을 천연대라고 한다.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라는 구절에서 하늘천, 연못연을 따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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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대는 자연과 어우러진 곳으로 도산십이곡 첫음절에 나오는 곳이다.


'천운대 돌아들어 완락재 소쇄한데

책 속에 묻혀사는 생애로 즐거움이 끝이 없네

이중에 소요하는 즐거움을 말하여 무엇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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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타석 : 도산서원 시설물 모든 이름은 퇴계가 손수 붙여 성리학적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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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취병산 :: 퇴계 선생 도산잡영 중 안동호 자락에서 구름이 흐르는 새벽 비경을 노래한 한시

동취병산/퇴계

옹기종기 뭇 봉우리는 왼쪽 푸른 병풍인데

비 개인 뒷산 아지랑이 때때로 흰구름이 비꼈네

잠깐 동안에 변화하여 비를 날리니

이것이 영구의 붓끝에서 나오는 게 아닐는지

**영구 : 송나라 산수화가 이성(李成)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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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취병산이다. 천 원 지폐에서 볼 수 있는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가운데 '서취병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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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헌은 여울목을 본다는 뜻으로 <맹자>의 '물을 구경하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는 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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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습재는 일단 농운정사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쪽 마루는 시습재, 서쪽 마루는 관란헌으로 휴식을 취하는 곳, 마루 뒤쪽은 지숙료가 있어 공부하러 온 학생이 머물렀던 곳이다. 배우고 익혀서 진리를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이상 도산잡영 칠언절구 18 수다. 도산서원은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곳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퇴계 선생의 뜻을 받들어 학문을 넓게 익혀서 예로 행한다면, 이런 행사가 더욱 보람차고 뜻깊을 거다.


밖으로 나오니, 건물 앞뜰에 천구의가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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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자격루).jpg


서울에서 내려간 우리 일행은 일정상 끝까지 참여치 못하고 상경길에 올랐다. 단양을 지날 때 이재갑 국장님이 그 옛날 단양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금계(錦溪) 황준량(1517~1563)이 '단양의 민폐를 고하는 상소문을 올린 일화를 전하느라 한 마이크 하신다. 금계의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경북 풍기 출신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1540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직을 역임하고 1550년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등용되어 중종과 인종 두 임금의 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병조좌랑으로 전임되어서는 숭유억불 상소문을 올렸다. 사헌부지평에 올라 모략으로 파직되자 외직을 자청하여 신영(현 경북 영천) 현감으로 나가고, 뒤이어 단양군수, 예조정랑, 병조정랑을 거쳐서 1560년 성주목사에 임용되었다는 이야기다. 금계 황준량의 훌륭함도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친구시니, 퇴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정대철 어른이 홍범구주(洪範九躊)를 송독(誦讀), 남해 김원동 님이 난정기(蘭亭記)를 송독, 김경영 님이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낭송을 하셔서 다채로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 날이 이생진 시인이 이 세상 소풍을 끝낸 날이어서 성산포 바다가 더욱 그리워졌다.

일행은 이재갑 국장님이 프린트해 온 주자의 소학제사(小學題辭)를 떼창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제창하며 뜻을 기렸다.


서울 도착하여 퇴계 선생 후손 진성 이 씨 문중의 배려로 양재동 산들해에서 맛난 만찬을 즐기고 헤어졌다. 관계 요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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