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갈망을 드러내는 예술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by 쇠네스보헨엔데

<외로운 도시>는 에드워드 호퍼로 시작하지만 장 바스키아로 끝나는 앤디 워홀에 관한 책이다. 미국 문화와 예술과 특히 미술에 취약한 나에겐, 화려하고 공허한 메가시티의 아우라에서 한참 벗어나 살게 된 탓에 그곳의 외로움도 상실도 부럽기만 한 나에겐, 페이지 한장 한장이 벽돌처럼 무거웠던 책이다.


내용의 생소함과는 별개로, 메밀국수처럼 뚝뚝 끊어지는 맥락의 흐름과 의도한 듯 서걱이는 서술- 예를 들자면 "대도시에서는 관계가 연결된 가능성이 도시 생활의 비인간화 도구에 거듭 패한다."- 때문에 맑은 정신으로 책장을 열었다가도 금세 머릿속이 흙탕물로 변하는 매직을 경험했던 낯설은 독서의 경험. 하지만 지적 자극을 원해 책을 고를 때마저도 익숙하고 구미에 맞는 방향을 고집하게 되는 게 노화의 일환이므로 이러한 낯섦과 고됨을 두고 구태여 투덜거리지는 않겠다.


"고독하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 그건 배고픔 같은 기분이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기만 굶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창피하고, 경계심이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분이 밖으로 드러나, 고독한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된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외로움을 지고 산다고 하고 문화적으로 어떤 고독은 추앙을 받기도 하지만, 무리생활의 원시적 본능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집단에서 동떨어진 상대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지극히 외로운 상태로 뉴욕에 떨어져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위태로운 생활을 전전하는 작가는, 뉴욕을 그리고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여겨져 모두의 사랑을 받는 듯 하지만 실은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상실감으로 일생을 살았던 유명 예술가들의 흔적을 밟으며 자신의 고독을 위무한다.


사실 상실, 고독, 소외 등 이 책의 핵심 키워드를 드러내기에는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나 헨리 다거가 더 맞춤할 것이나 내 기억 속에 이들의 일화가 남지 않은 것은 이 책 중반의 어느 지점부터는 책과 이해력 사이의 블루투스가 번번이 해제되어서 손은 페이지를 넘기지만 머리로는 그 무엇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 두 이름은 그저 쓸쓸하고 불우했던 인상으로만 남았다.


그나마 다행으로, 1월 말이면 종료되는 장 바스키아 전시를 보러 서울에 한번 가야겠다고 벼르던 참이라 앤디 워홀과 장 바스키아가 연결되는 후반부에서는 파뿌리처럼 헝클어졌던 정신이 가지런히 가다듬어졌다.


작가는 "찬사를 받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 그를 계속 거부하는 사회 속에서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흑인"이었던 바스키아와 "너무 연극적이고 너무 게이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미술관에서 거부당한" 후 자신을 연기하기 시작한 워홀의 족적을 좇던 중,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가 일체감을 회복한 것은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또는 사랑에 빠짐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만나봄으로써, 이 연결을 통해서, 고독과 갈망은 그 사람이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마침내 막막한 안개를 뚫고 나온 것 같은 작가의 고백 앞에 안도하면서도 잠시 황망했던 것은 한없이 황폐했던 390페이지에 비해 마지막 두 페이지가 너무 다감해서였던 것 같다.


"우리는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모습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께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존재했던 것들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을 위한 시간이 영영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뭐라구요? 이제와서 다정하자구요?


좀비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때 성질을 내며 팝콘을 던져버리는 삐뚤어진 관객처럼 나는 책의 커버를 '쿵'하고 닫아버리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장 발행면에서 '초판 3쇄'를 보고 나니 모든 불만은 내 부덕의 소치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불편함을 혐오하는 시대에 고된 독서를 사서 하는 약 5천 여명의 독자들을 앙망하는 마음으로 보라색 간지를 슬며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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