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의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독서는 승패를 쉽게 가를 수 없는 게임이다. 사로잡힌 듯 푹 빠져 읽었는데 막상 돌아서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책이 있는가 하면,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심정으로 꾸역꾸역 읽었는데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책도 있다. 그 둘을 겸비한 독서라면 금메달감 완승일테지만 책의 함량에 더불어 독자의 태도와 취향, 여건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로 빚어진 그런 쾌거는 쉽사리 이뤄지지 않는다.
자아보다 타자를 먼저 챙겨야 하는 엄마이자 미디어에 하릴없이 유혹당하는 쉬운 시청자로 몇 년을 살다보니 집중하여 한 책을 끝낸 뒤 찾아오는 오롯한 쾌감은 어느새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겨졌다. 더군다나 돈을 받고 책을 읽는 일을 여러해째 하다보니, 마감일과 계약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책에는 일부러 기력을 빼지 않으려는 우스운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박지영 작가의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는 이처럼 망조가 든 것 같은 내 독서생활을 문득 뒤돌아보게 한 책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분명 내 취향의 책이고 마땅히 홀린 듯이 붙들어야 할 이야기인데 들었다 놓았다를 여러 차례 하면서 맥이 풀려버린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새삼 내 독서력을 점검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박지영의 재기발랄한 필력은 20대때 열광했던 박민규를 연상케 한다. 메인은 물론 서브 캐릭터들까지도 입체적이고 세밀하게 구축하여 내 곁에 있는 누군가로 느껴지도록 한 인물 조형력도 뛰어나다. 각 인물이 대표하는 인간 군상을 발견하고 그 디테일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지은과 복미영의 삶을 한 쾌로 엮은 '이모의 호환성 연구'는, 젊을 때는 돌봄으로 착취당하다가 말년에는 기계에 대체되는 '이모들'을 생애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니 이 길지도 어렵지도 않은 이야기를 어째서 미역국에 밥 말아 넘기듯 술술 넘기지 못했을까, 궁금하고 답답하지만, 어쨌든 이 미덕 많은 책을 나는 지리멸렬하게 읽었고 그건 작가의 역량과 책의 함량과는 무관한 내 개인의 문제인 것만 같다.
"김지은은 그 문을 닫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복미영을 본다.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 만들어내는 칼과,
그것을 거부하는 대신 그것을 가슴에 꽂아두고 따뜻하게 달구려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복미영은 사촌 조카 집에서 조카 손주를 돌보며 근근히 살아가며 연예인 덕질로 낙을 삼던 '통상적인 복미영'을 버리고 '관념적인 복미영'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최애로 삼는 '복미영 팬클럽'을 창단한다. 그 1호 팬이 된 김지은은 '이모의 호환성 연구'라는 독립영화를 기획하던 '관념적 자아'를 등지고 먹고사니즘을 우선하는 '통상적인 자아'에 설득되어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자기 엄마를 떠맡은 은수이모를 버리려 한다. 김지은이 은수이모를 버려도 되는 사람, 즉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고 지목한 인물이 다름 아닌 복미영이었고 복미영은 '성난 종기처럼 건드리면 위험한 사람'이 되겠다던 '관념적 아티스트웨이'의 최초 목표와는 달리, 가슴에 칼을 꽂으려 달려드는 김지은을 기꺼이 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나이가 든 덕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침을 뱉고 싶으면 침을 뱉고, 신랄한 말을 들으면 신랄한 말로 되돌려주기도 하는 사람"이고자 했는데, 이제는 '가슴에 꽂힌 칼을 따뜻하게 달구려는' 복미영의 마지막 결심이 여운으로 남아 내년에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볼까하는 답지 않게 숭고한 결심마저 품어본다. 큰 칼에 찔려 구천을 떠돌던 쓸쓸하고 찬란한 신, 공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