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라 May 06. 2024

매일 동그라미 그리기

가수, 연기자, 작가, 화가, 라디오 진행자, 기타리스트, 등등 김창완 아저씨를 소개하는 말은 많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책을 내고 ‘김소영의 라이도 북클럽’에 나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분이 아침마다 원을 그린다는 것을.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작고, 큰 원을 많이 그린다고 하신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관심이 생겼다. 나도? 해볼까?


얼마 전 드로잉을 배워보고 싶어서, 빈 종이에 선을 긋고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그려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것도 몇 일하지 못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하얀 종이를 펼쳤다. 마음에 드는 연필을 들었다. 적당한 크기의 원을 그렸다. 원 그리기는 하나의 점에서 시작해서 그 점까지 그리는 일이다. 첫 동 그라니는 예쁘게 그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정동그라미는 아니었다. 이번엔 조금 크게 그려볼까? 아이고 조금 더 크게 그리니, 더 삐뚤삐뚤하다. 그럼 이번엔 작게 그려볼까? 오, 이건 그래도 꽤 괜찮아 보인다. 이번엔 천천히 그려보자. 손끝에 힘을 빼고 천천히 정성스럽게 선을 그었다. 처음 휘리릭 그린 것에 비해서는 더 좋아 보인다. 어라. 이거 꽤 재미있는 일이네.


한 점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원을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의식적으로 한건 아니었다. 그럼 오른쪽으로도 그려보자. 이상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처음엔 원을 위에서 시작했는데, 아래에서 시작해서 위로 원을 만들어볼까? 아,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 것도 어려가지 방법이 있네.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번엔 조금 큰 원을 그렸다. A4용지의 반이 채워졌다. 이건 원도 아니게 그려졌다. 이미 반 이상 그려지고 있을 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머야? 하지만 멈추지 않고 끝까지 그리고 크게 웃었다. 잘 안되네. 큰 동그라미는 어렵구나. 어떻게 해야 잘 그리지?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큰 동그라미를 그리고 무심히 보고 있으니, 원 안이 너무 비어 보였다. 그래서 큰 동그라미 속에 작은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큰 원에서 시작한 원은 점점 안이 채워지면서 작은 원 여러 가지가 함께 하게 된다. 간격을 맞추어보려고 신경을 쓰면서 그렸다. 빈 종이에 그리는 큰 동그라미에 비해서 이미 그린 동그라미 속에 그리는 것은 조금 더 쉬웠다. 이미 그려진 것을 보면서 조심조심 그리면 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해보자. 작은 원에서 시작해서 점점 일정한 간격으로 큰 원을 그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안정감이 든다. 작은 원의 라인에 맞추다 보니 제법 큰 원도 찌그러지지 않고 그릴 수 있게 된다. 머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점점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싶어졌다.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른다. 김창완 아저씨의 책 제목처럼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왜일까? 예쁘게 그리고 싶어서? 아님, 그것이 맞다고 생각이 되어서? 아니면 내 마음속 깊이 이런 생각이 들어있어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 둘 그리면서 이번엔? 이번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싶은 욕망을 감추기 어려웠다. 자를 이용해 볼까? 종이를 잘라서 컴퍼스 대용으로 사용할까? 아니면 원 모양을 대고 라인을 그릴까? 살짝 가이드를 주고 그려볼까? 이런저런 궁리를 머릿속으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원은 내가 처음 그리고자 하는 원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나는 삐뚤삐뚤한 동그라미 여러 개를 그리게 되었다. 




동그라미 그리기가 어쩌면 살아가는 이야기 인지도 모르겠다.


한 점에서 시작해서 다시 그 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일정하게 동그랗게 만들어야 한다. 목적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사람은 움직이게 된다. 이런 생각으로 펜을 들지만, 처음에는 쉽지 않다. 당연히 비뚤어진다. 처음으로 돌아와 그 점을 만나기도 어렵다. 가끔 그 점을 지나치기도 한다. 


작은 원은 비교적 쉽게 그릴 수 있다. 이유는 무얼까? 작은 원은 한 호흡에 그릴 수 있다. 시간도 적게 걸린다. 손도 자유롭다. 하지만, 그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한 동그라미가 아닐 때가 많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착각을 쉽게 한다. 틀린 부분이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만족한다. 작은 목표는 쉽게 끝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도 쉽다. 종이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웬만한 종이의 귀퉁이에다 쉽게 그려 넣을 수가 있다. 큰 원처럼 새로운 종이를 펼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 여러 번 연습을 할 수 있다. 여러 번 그릴 수 있다는 것 예쁜 원을 그릴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작은 원은 다시 여러 번 시작할 수가 있다. 한 점에서 시작해서 목표점을 만나는 순간 망했다. 이런 생각이 들어도 바로 옆 빈 곳에 다시 시작해 볼 수가 있다.



원을 그리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어떤 것이 비교적 쉬운지를 해보았다. 왼쪽으로 돌리는 것이 쉬운지, 오른쪽으로 돌리는 것이 쉬운지, 위 꼭짓점에서 아래로 긋는 것이 쉬운지, 아래에서 위로 그려나가는 것이 쉬운지. 분명히 내가 편하게 원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계속 편하고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해서 예쁜 동그라미를 빨리 그려보고 싶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려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는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안 해본 일을 해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매일 생각한다. 


가장 큰 도전은 종이 한가득 차게 큰 원을 그릴 때인 것 같다. 일단 마음을 먹어야 한다. 비어있는 흰 종이를 가득 채울 원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종이를 잘 고정한다. 시작하고 흔들리면 낭패다. 손가락이나 팔이 걸리지 않도록 주변도 정리한다. 그리고 천천히 시작을 해서 숨을 멈추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원을 그려 나간다. 그러다 삐끗하는 순간이 오면, 마음속 깊이 실망감이 든다. 이번에도 망쳤네. 역시 큰 원은 무리인가 보다. 이번엔 망쳤다고 하고, 다시 시작할까? 다시 작은 원을 여러 개 그리는 것으로 돌아가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지만, 나는 그 원을 자세히 보았다. 누가 한 번에 그리라고 명령 내리지 않았다. 한 선으로 그러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그리고, 지우개를 쓰면 안 된다는 말도 없었다. 그렇다. 조심조심 다시 그 위에 그려도 된다. 조금 선이 겹쳐도 될 것 같다. 아닌 것 같으면 지우개로 살살 지우고 다시 그려도 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는 두려움이 조금 없어졌다. 


무슨 일이든 한 번에 잘하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구나. 


우연히 시작하게 된 동그라미 그리기가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책상에 앉아서 흰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연필을 들고 조심조심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잘 그렸는지, 그런 비교는 하지 않는다. 그저 슥슥 흰 종이 위를 지나가는 연필의 느낌이 좋고, 굵게도 얇게도 

그려지는 동그라미가 왠지 예쁘다. 한 장을 다 채우고, 날짜를 적고 사인을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오늘을 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