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 인터폴 금융국(IFCACC) 창설의 서막
*FCU: 금융범죄팀 Financial Crimes Unit
CD: 사이버국 Cybercrime Directorate
OEC: 첨단범죄국, Organized & Emerging Crime
DOEC: 첨단범죄국장 Director OEC
EDPS: 사무차장, Excecutive Director for Police Service
SG: 사무총장 Secretary General
**FCU는 OEC 산하. OEC와 CD는 모두 EDPS 산하.
오늘 일기는 소소하다. 세계 평화와 범죄조직 소탕은 잠시 미루어야 한다. 그저 또 한명의 직장인 이야기다. 여기도 조직인지라 좋은분, 나쁜분, 이상한분이 있을 수 있는데, 임란(Imran)과 나는 주로 good people과 great people로 나누곤 한다. 잠시 나아가자면 임란과 대화는 늘 즐거운데, 우리는 소위 말하는 남의 말을 전한다거나 뒷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불가피한 경우 부정언어를 회피하거나 적절한 은유를 활용한다.
"How's the guy newly joined, is he good or great" "yeah, good man."
(새로 온 친구는 어때요, 아주 괜찮아요? 아니면 그냥 괜찮아요)
언어가 순화되고 대화가 품격있다. 적절한 어휘와 톤을 활용하면 모국어를 넘어서도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은 품격을 잃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기습
"I'm very happy to announce that we will welcome FCU under the CD family"
(우리 사이버국 CD에서 금융팀 FCU를 한 가족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 CD가 FCU를 흡수 합병하기로 했습니다)
업무는 이메일로 시작된다. 메일마다 보낸이와 제목에 따라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회원국의 긴급한 사건이 최우선, 라인 매니저들과 동료들, 다른 국제기구 컨택과 기타 등등 대략 적게는 서른 개, 많을 때엔 70~80여개에 달하는 이메일들이 하루 사이 쌓여 간다.
마드렛(가명, 사이버국 비서) 메일은 보통 우선순위에 해당하진 않다. 그런데 제목이 심상치 않아 제일먼저 눌렀다. 우리 금융팀을 사이버국으로 합병한다는 것이다. 업무 이메일의 요령은 받는 이와 참조(To, Cc) 그리고 그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역시나 그 필체와 격에 놀랐다. 영어권 출신이라 하여 모두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드렛은 전체 사이버국 직원들과 싱가포르에 있는 금융팀 2명에게 저 이메일을 보냈다. 사이버국장이 참조되어 있고, 리옹 첨단범죄국장은 빠져있다. 내 라인매니저인 토모(Tomo)도 없다.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우선 한 명의 비서가 결정하여 전달할 사항도 아니거니와,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소식인지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팀이 사라진다니, 그럼 토모는 사이버국에서 한 자리 받으려나, 그럼 리포팅 라인은 어떻게 되지. 게다가 거의 반 년 전부터 이 안건으로 내내 토론과 잡음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각자의 속내들이 복잡하게 얽혀 왔었기에 이게 이렇게 한순간에 판정패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속 부서별 역량과 리더십, 역할과 재량이 다르기 때문에 구조를 어떻게 개편하는지는 조직 사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중요한 문제다. 가령 인터폴 사무총국에서 사이버국과 금융팀을 이른바 '사이버금융팀'으로 명명한다면, 회원국에게 그간 진행되어온 현안들에 관한 주무 부서는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협업 방식에 관한 설명 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사실 장기적으로는 사이버든 금융이든 이론상 구분 자체가 점점 의미가 적어지는 세상이 되어간다. 형편에 따라 구조적으로 팀이야 어떻게 구성하든 일만 잘하면 그만이다. 더 깊게 들어가면 사실 우리는 CD management의 리더십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간 FCU가 쌓아온 업무방식과 팀웍이 잠식되는 것이 가장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만일 정말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라인 매니저들은 먼저 소속 직원들에게 의견을 청취하는 등 형식적으로나마 설득과 수용의 절차가 선행된다. 또한 국장, 팀장들은 인사이동, 구조조정 등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타운홀(Town Hall) 미팅을 개최한다든지 하여 저간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와 감득을 구하는게 보통이다. 하물며 가장 왕성히 활동하는 오퍼레이션 비즈니스 유닛 중 하나인 금융팀을 합병하려면, 먼저 현재 소속국인 첨단범죄수사국(OEC, Organized Emerging Crime)이 어떤 입장인지부터가 전제되었어야 하는데 그것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내가 일라나(Ilana, DOEC, 첨단범죄국장)여도, 이 팀을 CD에 내어주고 싶진 않을것 같다. 싱가포르 10시, 아직 리옹은 새벽 4시다.
전투의 패배와 전쟁의 승리
사실 CD와 FCU의 크고작은 분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바라보는 사람마다 시각 차가 있고, 사물의 본질을 하나여도 관점은 여럿이기 마련이다. FCU에서는, 사사건건 FCU가 하는 일에 CD 국장이 일방적으로 불평하는 것처럼 여겼다. 아마도 CD입장에서는 함께 성공적인 경험을 이뤄나가고 싶은데, FCU가 정작 중요한 일은 잘 공유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구조적인 요인으로 FCU는 늘 CD에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CD국장이 FCU팀장보다 위니까. 거대 사이버국이 겨우 유닛 레벨인 금융팀에게 사사건건 지적하는것도 유치하다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결국은 인터폴이라는 한 지붕을 덮고있는 팀이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우리는 내부와 외부에서 직면하는 여러 도전들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것 또한 회사에서 언제나 생길 수 있는 내부적인 의견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고의적이든 본의 아니든 일을 하다보면 이렇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존중감에 타격을 입게 하는 일들이 생긴다. 나는 이것 또한 업무능력 중 하나인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라고 보는데, 어찌되었든 저 이메일 하나로 인해 많은 구성원들이 급선무인 회원국 사건들을 뒤로 미루고 사안의 진상 규명에 천착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리옹팀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정말로 CD와 합병하기로 한것인지, 이메일에 카피되어 있지 않던 내 라인매니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동의하는 것인지 등에 관하여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소통에 나서야 한다.
아직 써머 타임 시작 전이라 오후 세시를 기다리며 짚어야 할 쟁점들을 생각했다.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회원국 금융사이버범죄에 최적의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통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꾸준히 의견을 개진해 왔다. 단순히 책상을 몇층에서 어디로 옮기는 문제만이 아닌 것이다.
리옹의 아침이 열리기 전, 문제의 이메일을 라인 매니저들에게 포워딩했다. 나는 오늘 이 연락을 받았는데 알고 있었는지, 우리 매니지먼트에서 동의한 것인지와 향후 계획은 어떠한지가 주요 골자이다. 오후 세시가 되자 첨단범죄국 상황은 황급히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OEC 매니지먼트에서는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내가 할 일은 리더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대응을 촉구하며 후에 설명을 듣는 것이다. 토모가 분주히 여기저기 문의했고, 굉장히 빠른 시간내에 OEC 팀미팅이 소집됐다.
준비되지 않은 기습은 허무하리만치 무디었다. 국 간 전혀 합의되지 않은 사안이고 DOEC가 직접 CD국장과 함께 EDPS와 이야기하겠다는 답변이다. 하루가 참 길고 많은 일들을 한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회원국에 기여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건 파일을 하나도 열지 못했다.
- 2021년 2월
SG 티타임, IFCACC 창설의 서막
즈음하여, SG Coffee time이라는 작은 행사들이 이어졌는데, 사무총장님이 몇몇 직원들과 그룹핑하여 티타임을 가지는 것이었다. 우리 팀에서는 내가 초대됐다.
"토모상, 이건 그냥 티타임이 아니에요. 저는 이게 제 인터폴 라이프 최고의 프레젠테이션이라 생각하고 준비할 생각입니다" (영어)
"JK, I always respect your opinion! please go ahead!!"
(언제나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리 해 주세요)
조직의 수장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보고서를 쓰는 것처럼 접근하면 이해가 쉽다. 말 한마디에 들어갈 단어와 문장을 전략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내가 이 미팅에 초대된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금융팀의 일원으로 가는 것이니만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여럿 중 발언할 기회는 많아야 한,두번. 짧은 2,3분 스피치 두어개를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스크립트 구조를 짰다. 어느 덧 티타임 날짜가 왔다.
"사무총장님, 지난 2018년 두바이 총회에서 총재님 선거가 있었고, 그때 저는 대한민국 대표단으로 참가하여 SG를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FCU 소속직원으로 다시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어)
"Welcome JK! Yes thanks for joining and glad you're doing well"
(물론, 잘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유르겐 스톡 사무총장은 생각보다 기억력이 정말 좋았고 이런 식으로 환영해주셨던 것 같다. 참석자들에게 한번 정도씩 돌아가며 발언기회가 주어졌고 화기애애했다. 그러다가 뜨거운 감자가 갑자기 날아왔다.
"JK, how do you think of the re-structuring CD & FCU, do you find the benifeit on it"
(CD와 FCU를 합병하는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프로들의 미팅은 언제나 따뜻하게 이뤄진다. 미소와 함께 티타임은 비즈니스 미팅이 되었고, 모든이의 관심은 나에게 집중됐다. 역시 오늘의 화두는 사이버와 금융이다. 준비하기 잘했다.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구조로 답변드렸다.
(영어)
- 감사합니다 사무총장님.
- 인터폴이 금융범죄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전체 금융범죄에 대응하는 부서가 일개 비즈니스 유닛 단위로 존재하고, G4 코디네이터 레벨이 이를 대표한다.
- 유로폴은 최근 경제금융범죄센터(EFECC)를 사이버국(EC3)와 별도로 창설해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 최근 가상자산 자금세탁 범죄 증가 등 글로벌 금융범죄 대응은 우선순위가 높아지고 있다.
- 조직 구조는 정책적인 문제이고, 각 회원국마다 대응 방법은 다양하지만, 대한민국의 경우 사이버와 경제 분야가 각기 병행하여 공존, 협력하고 있다.
- 인터폴이 금융범죄에 어느 정도의 중요도를 생각하는지 회원국에 보여줄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너무 말을 많이 했다고 슬슬 생각될 즈음 차분히 마무리지었다. SG께서 얼마나 납득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유로폴을 조금 힘주어 언급했다. 왠지 리옹에서는 헤이그를 약간의 라이벌처럼 여기는듯 하기도 했다. SG정도 되는 위치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보고를 받는다. 아마도 각 차장들 및 소관 국장들과는 당연히 이야기나누었을 것이고 또 독일 출신인 만큼 독일 파견 협력관들을 통해 별도 정보보고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안에 관하여 다각도로 살펴본 뒤 최종적인 정책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내가 줄 수 있는 인풋은 제한적이고 그것이 얼마만큼 정책에 영향을 미칠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아주 미미할지라도 주어진 기회에 해야할 바를 하는것은 내 소임이다. 마치고 토모와 통화했다. 토모상, 우리 금융국 만들어요.
- 2021년 3월
** 논거를 정리하며 논조를 강화하기 위해 아래 팔로업 메일도 보냈다. 좋은 티 타임이었고, 준비된 스피치와 마무리 다지기까지 할 일을 다 했다.
Epilogue
..2022년 1월, 인터폴 금융반부패국(INTERPOL Financial Crime & Anti-Corruption Centre)이 신설되었다. 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토모는 부국장이 되었고, 나는 신설 금융범죄팀장이 되었다. 전투에서도, 전장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없다. 이제 다시 회원국에 봉사하는 위치로 돌아갈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