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변유변 Apr 29. 2023

헤이그 출장이 취소됐다

2022년 8월. 러시아가 내 삶에 미치는 영향


모니터에서 눈을 떼니 밤이 깊었다. 버스는 끊겼다. 서두를 것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천천히 집에가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미국 대사관, 글렌이글스 병원, 보타닉 가든을 지나며 걸었다. 밤에 걷는 것은 좋았다. 나무가 바람을 흔드는 소리들과 간간이 지나는 자동차 사이에 오롯이 혼자가 된다. 싱가포르에 산지 삼년, 집에 걸어가기는 처음이었다. 


마침 헤이그에서 걸려온 늦은 연락 때문이었다. 다른 국제기구 파트너들과 함께 준비해온 컨퍼런스에 러시가아 등록했다. 유로폴은 등록을 거부하겠다고 알려왔다. 유럽연합 정책상 러시아와 협력할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터폴은 회원국 지위에 있는 나라들에 대하여 임의로 차등조치를 취할 수 없다. 헌장 상 정치적 중립의무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결기구와 집행기구가 분리된 구조에서 사무총국이 이를 결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 


두어 번의 긴급한 회의가 있었다. 나름의 참신한 제안과 검토도 수반됐다. 유로폴은 거부하되 인터폴에서 별도로 컨퍼런스를 생중계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으로선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수정안은 결렬됐다. 


나는 집에 걸어가며 나의 개인과 조직, 의견과 규범, 표현의 자유와 그 한계에 대하여 잠시 생각했던것 같다.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준 다른 국가에로의 폭력적 '침공'과 전쟁범죄에 대하여 얼마나 진지했을까. 국제기구로서 내가 속한 조직의 선택지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할 논거들,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동조와 국제기구들의 규범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생각하긴 했을까. 


집으로 걸어가며 취소할 항공권을 생각하고, 만나지 못할 옛 친구를 생각하고, 환불 불가 호텔을 예약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다른 회원국들에는 어떻게 설명할지 당면한 업무들을 생각하다 보니, 이윽고 금세 집에 도착했다.


2022년 8월


2019년 3월 암스테르담, 유로폴 가는길.


작가의 이전글 흔한 인터폴 요원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