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년 차
로마에서 자카르타로 30억이 넘어갔다
아무도 몰랐다. 재택근무를 열 달 넘도록 하게 될 줄은. 처음부터 큰 모니터를 살걸, 곧 끝나겠지 하며 붙잡고 있던 작은 랩톱으로 구글 지도를 확대했다.
310만 유로가 이탈리아에서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
코로나가 한창 창궐하던 2020년 초, 아시아에서 서방세계로 넘어간 전염병의 흐름과 함께 범죄 양상도 이동했다. 범죄자들은 늘 기회를 포착했고, 의료장비 부족은 마스크 사기 같은 새로운 유형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홍콩, 태국 등 아시아 권역에서 공조 요청이 많았는데, 갑자기 유럽 국가들 사건이 늘었다. 나라마다 은행마다 다르지만 돈이 넘어간 게 이틀 전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인다. 범죄 자금을 적시에 추적해서 목적지로 향하는 중간에 가로채는 것이 목표다.
부지런히 인도네시아 금융정보분석원에(PPATK, https://www.ppatk.go.id/) 연락을 취해 본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이탈리아 재무 경찰(Guardia di Finanza, https://www.gdf.gov.it/it) 요청사항을 다시 검토한다. 이러한 유형의 공조수사는 수신 국가를 특정하고, 담당 기관과 부서를 알아 보고, 긴급 계좌 정지가 필요한 경우 일단 그러한 제도가 있는지(Freezing, Provisional measures without court order), 있다면 어떤 요건하에 가능한지 등을 살펴보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매 사건마다 새롭게 검토하는 수밖에 없다. 절차와 법령이 나라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필요한 자료들과 사실관계가 준비되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다양한 문화권과 서로 다른 형사사법시스템은 공조수사에서 쉽지 않은 문턱이다.
첩보 입수 이틀 만에 250만 유로를 확보했다.
그 나라에서 지급정지 권한이 있는 기관을 찾고 합당한 절차를 신속히 밟은 것이 핵심이다. 범죄 수익을 우선 확보했으니 수사를 진전시키기 위해 사건 공조 회의를 열었다. 해당국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회의석상에 올리는 게 중요하다. 이탈리아 현지 인터폴과 사건 담당 재무경찰, 주 로마 인도네시아 대사관 그리고 인도네시아 금융정보분석원 각 대표들과 우리 팀 범죄정보관(Criminal Intelligence Officer)들이 모여 앉았다. 미리 검토한 쟁점들을 양 측에 전달했다. 미진한 점에 대해 무엇이 보강되어야 하는지도 함께 교환했다. 수사회의를 마친 그 다음주, 인도네시아 북부 섬에서 용의자 세명을 검거했다. 맥주를 마실 차례다.
(인도네시아는 압수한 자산을 모두 현금화해 언론보도를 낼 때 좌악 깔아놓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주 실무적인 직업적 궁금증이 일었다. 누가 펼치고 다시 정리하며 끝까지 보안(?)을 책임질까. 한 뭉탱이 없어지면 안되니까.)
여긴 어디, 우리는 누구
위와 같은 사건 공조가 우리 금융팀의 주된 일상이다. 인터폴은 프랑스 리옹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형사경찰기구다(ICPO-INTERPOL, International Criminal Police Organization). 약 1,000여 명이 넘는 직원들이 리옹 사무총국과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단지(IGCI -INTERPOL Global Complex for Innovation)에서 다양한 유형의 범죄에 대응하고 있다. 인터폴 공용어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4종류고, 대부분 다른 국제기구들과 마찬가지로 통상 영어로 소통한다. 생각 외로 언어보다는, 기획이나 직접 수사한 경험 자체가 더 중요한 요소일 때가 많았다. 공조사건을 다루려면 서로 다른 수사 환경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금융범죄팀은(FCU, Financial Crimes Unit) 인터폴에서 금융범죄에 대응하는 가장 직접적인 부서다. 5개 대륙 13개국에서 온 15명의 동료들이 함께 일한다(2020년 기준). 회원국과 9개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고 자금세탁방지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업무로는 위 사례와 같은 공조수사, 기타 다른 국제기구들과의 협업, 국제회의 기획 및 발제 등을 맡는다. 리옹과 싱가포르에 각 사무실을 두고 시차 없는 대응을 목표로 한다.
출장이 일상, 특기는 화상회의
첫해 비행기 표를 세어 보니 서른 장이 넘었다. 일단 출장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고 또 발제를 이리 많이 하게 될 줄 몰랐다. 해외여행으로는 보통 염두에 두지 않을 만한 곳들을 다녔고 꿈꾸던 삶은 맞는데 생각보다 조금 피폐했다. 한 번은 서른 시간 넘게 비행기를 갈아타 가며 중남미에 위치한 도미니카 공화국에 갔다. 3일간 도미니카 경찰, 검찰, 금융정보분석원 관계자들과 함께 해외로 범죄 자금이 흘러가는 이메일 무역사기(Business Email Compromise) 범죄 대응방안을 토의했다. 이러한 유형은 그야말로 속도가 생명이다. 계좌 송금이 일어난 순간부터 영화 <캐치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을 연상시키는 추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 적정한 ‘진단’을 내어 놓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의 시각에서 합리적인 대안이더라도 저마다의 사법환경에서 얼마나 수용되는지는 그다음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형사사법 절차가 전자화되어 있지 않거나, 일선 수사부서에서 공조수사를 요청하는 실무적인 절차와 지침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늦는 만큼 범죄 대응력은 약화된다.
보다 통상적인 출장은 국제회의에 초청되어 발표하는 경우다. 자카르타 에그몽그룹 회의, 마닐라 금융정보 분석 콘퍼런스, 서울 불법도박 자금세탁 콘퍼런스, 스위스 인공지능과 사기 콘퍼런스, 남아프리카 코로나19 경제범죄 동향, 유럽평의회 가상 자산 자금세탁 회의 등 다양한 금융범죄 관련 국제행사에 초청된다. 이 경우 준비에 대한 부담은 크지만, 간혹 국제행사에서 고국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상해 임시정부, 충칭 임시정부, 헤이그 이준 열사 박물관(Yijun Peace Museum) 등 출장지에 따라 뜻깊은 장소를 방문할 수도 있었다. 백여 년 전 만국박람회장 입장이 거부된 도시의 한 박물관에서 초청국 목록에 “Corée”를 발견했을때 벅차오르는 감정에 조용히 열사를 떠올렸다.
코로나를 겪으며 많은 행사들이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처음에는 잘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효율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더 풍부한 교류도 가능했다. 출장 시간이나 예산, 수용인원 등 물리적 한계를 넘으니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목표치가 더 확대되기도 했다. 사건 공조 역시 화상회의를 활용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최근에는 오랫 동안 준비해 온 크립토 콘퍼런스를 불가피하게 화상 행사로 전환하기도 했고, 보이스피싱 주요 기획수사를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며 추진하기도 한다. 그렇게 또 우리는 적응하고 있다.
- 2020년, 2년 차. 서울지방변호사회보 기고문 각색 "인터폴 국제공조수사"
http://news.seoul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