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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밤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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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imoriho Dec 17. 2021

불안의 밤

감정 하나가 곧 밀려올 것이고 그것이 나를 덮칠 것을 감지했다.



큰일이다. 감정 하나가 곧 밀려올 것이고 그것이 나를 덮칠 것을 감지했다. 불안. 그것은 잠잠하다가도 내가 안심하기 무섭게 불현듯 출현한다. 그리고 한치의 오차 없이 완벽한 속도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나의 불안은 마치 선율 같아서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다. 비와 안개로 둘러싸인 작은 집, 쿰쿰한 마룻바닥 냄새, 그것을 연주하는 낡은 피아노의 건반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미숙한 연주자의 순간적인 망설임. 그 전부들. 바로 그것까지 나의 불안이며 그것은 여리고, 초라하면서도 아름답다. 언제나 갑자기 찾아와 나와 나의 밤을 반드시 집어삼키고야 마는 하지만 나조차도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그 은밀하고도 썩은 감정의 불씨 따위는 나를 평생 괴롭히고 있다. 나는 이번에도, 그것을 감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언제부턴가 그것이 내 마음을 두드릴 때면 세상에서 가장 미운 환영을 하곤 했다. 이유 모를 증오와 죄책감이 뒤섞인 불안의 밤을 보내기로 순종하고, 지독한 고통을 수반한 고독의 밤의 문을 나는 항상 스스로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은 항상 선율이라는 형태로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는데 이번에는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푸른빛의 새벽처럼 고요하고도 은밀한 불안의 소리. 그것은 타닥- 소리와 함께 나를 조용히 태우기 시작했다. 알 수 없다. 그것이 왜 나를 찾아온 것인지. 그리고 왜 전과 다른 형태를 띤 것인지. 그것은 불의 형태로 보였다. 잔잔한 모닥불의 형태를 하다가도 내가 손을 가까이하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잔인하게 태우는 영악하고도 매혹적인 불이었다. 나의 예상대로 나를 조용히 태우기 시작하던 불안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나의 세상을 온통 검붉은색 재로 채우려 했다. 나는 작은 방 안에 누워 움츠린 채 온몸으로 그것을 느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정신은 뜨거움을 참지 못 하고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반대로 나의 육체는 추위와 함께 떨고 있었다. 나는 홀로 남은 은사시나무였다. 시리도록 찬바람이 나의 가지들을 헤치려 들고 몸보다 거대한 불은 나의 뿌리를 전부 태우려 했다. 그때, 순간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아니, 나는 그때 위기라는 것 자체를 처음으로 겪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어떤 준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됐다. 그 준비란 아주 사소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것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없었다.



먼저 나는, 나의 속살이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두터운 겨울 양말을 종아리까지 올려 신었다. 그리고 따뜻했던 아빠의 품만큼 큰 옷을 입고서 오랜 흔적이 느껴지는 이불속에 파묻혔다. 온 세상은 깜깜해진 지 이미 오래였고, 나의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껴안은 채 희미한 빛이 아주 잠시라도 나를 비춰 주길 기다렸다. 나에 대한 희망이나 의지는 이미 죽어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이 너무나도 두려웠고, 그저 무언가에 의지하는 것만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득한 나의 과거를. 존재하지 않는 고향을. 그리운 엄마의 냄새를. 목소리를. 품을. 그것은 본능적인 의식이었다. 나의 세계가 깜깜해지면 나는 언제나 그 의식을 행해야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고도 그리워하는 회상의 단계에 이르러야 했다. 머지않은 과거에 존재했던 포근함을 회상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내가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절망적으로 그리워하고 바랐다. 나는 그날 밤에 또다시 혼자 상처 받아야 했고, 울어야 했고, 받아들여야 했다. 가소롭게도 불안의 화력은 그때 줄어들기 시작했다. 영악한 불안은 나의 두 눈이 붓고, 울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서야 다시 고요의 형태로 돌아간다. 나의 고통을 다시 잠재워준다.



만약 내가 그리운 존재를 회상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불안은 시리도록 찬 공기와 함께 내 살을 파고들고 나의 뼈 마디까지 샅샅이 파헤쳤을 것이다. 낯선이들에게서 나는 똑같은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찌르고 나를 마비시켰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등뼈는 굽을 것이고 나는 태아의 자세로 몇 시간이고 절규하는 밤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견디다 부서지기 시작하고 기필코 무너지고, 모두가 잠든 밤에 죽었을 것이다. 불안의 근원지에 영원히 갇혀 그리운 얼굴을 조금도 떠올리지 못한 채.



나의 초라한 준비는 그리움의 의미였으며, 회상은 나의 구원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그것이 나의 불안을 잠재워주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두려웠다. 불안이 나를 찾아올 때마다 나는 과거의 기억에 의지해야만 견딜 수 있는 것일까? 언제까지? 평생을? 회상의 과정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럽고, 결과는 언제나 숨어버린 불안과 함께 상처라는 검은 재만 가득히 남는다. 나는 또한 고통의 밤을 머지않아 또다시 겪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가여운 내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나의 구원이 더 이상 내게 존재하지 않음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구원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직 현재의 나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온 몸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불안은 나의 부정에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 또다시, 감정 하나가 곧 밀려올 것이고 그것이 나를 덮칠 것을 감지했다. 불안. 그것은 잠잠하다가도 내가 안심하기 무섭게 불현듯 출현한다.


불안의 밤은 잦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상실은 여전히 가혹하다. 나는 앞으로 불안의 밤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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