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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imoriho Mar 30. 2023

각자의 자유

#2 수영을 할 수 있어?













그 무렵 우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지드가 말한 대로 공적인 생각을 전부 없애버리려는 노력과 함께 내가 남길 혹은 만들어낼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어느 밤에는 몰래 일기를 써 내려가며 지난밤 B와의 일에서 이해점을 찾으려 했다. 매일 바다에 나가 물가에 비친 햇빛의 아른거림과 물기를 머금은 귀의 먹먹함을 기억하는 것에 집착하기도 했다. M은 자신의 활달한 성격에 맞는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노래, 현재의 감정, 갖가지의 쾌락을 찾고 있음과 동시에 공허와 슬픔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다. 또 다른 친구 B는 달콤한 디저트와 쇼핑 목록, 옷과 약 봉투, 캐리어를 수시로 정리하며 정리할 것이 더 이상 없는지를 찾았는데 나는 B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면 자주 변하는 감정이 얼굴에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대부분 서로의 이쪽과 저쪽으로 흘러들어 자연스러운 화합을 이루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침대로 돌아가 제각기 다른 물음표를 띄워야 했다. 나의 물음 끝엔 바쁜 일이라고는 없는 우리의 두 달간의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사로운 몽상과 의문의 반복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는데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 밤이면 우리는 묵계를 이루어 낸 듯 한동안 말을 줄였다.






니스에 있을 때는 우리가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가도 오직 하나의 단어 'allez!' (aller;가다)를 외치는 것으로 모두가 기분 좋은 결단이 내려졌다. 단어의 의미 그대로 마력의 '알레'는 백사장 위에서 비치볼 경기를 하는 건장한 청년들과 다이빙 포인트에서 방금 뛰어내린 프랑스 소년들의 움직임, 하얀 파동처럼 무언가를 찾고 있던 우리에게도 프랑스인들 특유의 활기와 자유로움을 불러일으켰고 긍정적인 태도로 무장하게끔 만들었다.






밖을 나서자 예상대로 전날의 흐림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정오의 태양빛은 옅은 주황색의 건물들을 더욱 아름답게 조명했다. 아이들은 분수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은 늘 짓는 표정을 짓고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거나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까만 선글라스 아래로 은밀한 공상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치솟는 물줄기들과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걷는 개들, 테라스에서 점심을 먹는 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모두 한 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여름은 생명의 계절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에는 마침내 여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우리는 전날과 같이 세 명이서 나눠마실 물과 초콜릿을 산 다음, 바다로 뛰어들었다.




"저 멀리 있는 사람들 좀 봐."


"우리도 조금 더 갈 수 있을까?"


"난 못 가!"


"왜? 난 해볼래."




과연 더 깊고 푸른 바다까지 가려면 발이 닿지 않는 모험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용기를 냈다. 곧이어 나를 따라 B와 M 모두 금방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수영을 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숨이 차 물을 먹기도 했지만 그날따라 뜨거운 태양 아래 바닷물은 소금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 오묘한 맛이 감돌았고, 더 이상 무리라고 느껴지면 곧바로 발이 닿는 곳까지만 헤엄쳐 오면 그만이었다. 니스는 우리가 수영을 연습하기에 딱 좋은 물살과 온도를 가지고 있어 중요한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뿐이었다. 물을 먹어도 겁을 내지 않는 마음. 곧 패기만만한 시작과 더불어 진지해진 우리는 한 명씩 돌아가며 목표 지점을 찍고 오는 것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서로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특히 M이 내 모습을 보고 따라 할 때면 배우인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이 투명히 비춰 보여 그렇게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날 우리는 맨몸으로 자연에 뛰어들어 방해와 몰입, 성공과 실패를 한순간에 마주한 것이었고, 그것은 우리가 함께 땀 흘리며 춤을 추고, 연기를 하던 어릴 적 시절을 떠올릴 만큼 강렬한 여름의 잔상으로 남게 되었다.



​​​



한참 수영을 하던 중에 흑인 남자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그의 피부는 햇빛에 반짝거렸으며 이곳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는 건강한 외모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은 이 바닷가 바로 앞에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나는 영어로 대답을 하다가도 프랑스어를 쓰려 애썼고 그런 내 태도에 흥미로웠는지 남자는 이제 프랑스어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Quel âge as-tu?" 몇 살이야?


"J'ai 22 ans. " 나는 스물두 살이에요.





한국에서는 두 살 더 많지만 외국 나이로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내게 나이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을 할 때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은 어릴 적 상상 속의 스물둘보다 현재의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와는 다르게 나는 배우고, 찾으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인데 그게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어도 그 누구라도 내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이제 스스로가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한 것은 역시 지드의 글을 닳도록 읽었던 덕분인 것일까. 여름을 싫어했던 나는 어느새 생명력을 되찾은 사람처럼 변화하고 있었다.





"수영을 할 수 있어?"


"잘은 못하지만 연습 중이에요."


"나랑 저기까지 찍고 오는 게 어때?"





그는 손가락으로 꽤 먼 곳을 가리켰다. 바다에서의 대화는 물살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그를 따라 당장 시도해 보고 싶었으나 내 실력으로는 저기까지 절대로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위험할 것이라고 말한 뒤 왼쪽으로 헤엄을 쳤다. 그는 오른쪽에 있었다. 사람들이 몰린 곳을 피해 나는 찰랑거리는 바다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천천히 움직였다. 이때의 감각으로는 바다에 몸을 맡긴 이상 나는 벌거벗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생각, 그것은 곧 아무리 패기가 있더라도 거대한 바다 앞에서 자만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을 내리 떠오르게 했다. 그곳이 바다이든지 도시든지 어디서든 마찬가지였다. 조금 지나서 뒤를 보니 그는 자신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곳으로, 수평선과 가까운 곳으로 유유히 헤엄쳐 가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모두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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