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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imoriho Mar 30. 2023

시내와 향수

#3 바닷가의 소금기 가득한 냄새가 닿게 되면,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시내에는 해변가와는 달리 햇볕에 빳빳이 마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따뜻한 색의 건물들이 유달리 푸른 하늘과 대비를 이룬다. 나는 눈앞에 놓인 아름다운 성당과 커다란 갈매기, 깨끗한 이정표가 지닌 순백의 색을 연결 짓거나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서 한 발치 떨어져 예술작품을 보듯 그들을 넋 놓고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면 언뜻 존재감을 과시하는 비둘기나 프랜차이즈 음식점에도 애정이 생겨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름까지 유럽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역대 최악의 폭염이 니스를 비껴감과 동시에 자신감으로 무장한 우리는 바깥을 돌아다니면 무엇을 하든지 만족스러웠다. 젊은 여자 셋이 모이면 아무리 심각한 일도 삽시간에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의 힘을 지니게 되어 어느새 일과 사랑과 미래에는-그런 중대한 것들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즉각적인 쾌락과 추억하기 좋을만한 기억들을 남기는 것에만 이끌리게 된다. 나는 그들과 있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우리가 함께 웃을 때의 순수한 눈과 입매는 혼자서 무언가를 해낼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고 그런 이유로 그들과 있을 땐 나 자신을 골똘히 생각하기를 저 바다 너머로 미루었다. 그러고는 곧장 시내로 향하는 것이다. 함께 거리를 걷고,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음악을 듣고, 쇼핑몰 밑에서 세일 중인 옷더미들을 동네 놀이터 지나다니듯 넘어 다니고 새로운 비키니 숍에 들어가 "이것은 별로야." "저건 색깔은 괜찮은데 재질이 영 아니네."와 같은 십 대 소녀들 같은 말들을 내뱉고서는 그냥 나오기를 반복하고. 그녀들은 특히 옷이나 아기자기한 리빙 숍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괜찮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는 아이처럼 행복해했다. 나는 여행 중에는 쇼핑을 자주 하지 않았지만 가끔씩 그들을 따라나섰는데 역시 물건을 보는 즐거움보다도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받은 다정함으로 가게를 둘러보는 그들의 애정 어린 눈빛을 동경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헤이그나 파리, 유럽 어디든 매력적인 도시에는 같은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가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향수를 풍기는 가게에 발을 들이게 되면 이제 내 눈은 빛나기 시작한다. 니스빌에도 물론 그런 곳이 있다. 가슴을 따끔거리게 하는 향기는 어떤 아름다운 물건이나 사치의 매력보다도 여러 도시에서 보낸 기억들의 집결로 나를 유혹한다. 그 힘은 실로 강력해서, 저기 빳빳하게 다려져 널린 순백의 셔츠는 이내 돛을 올리고 항해하는 보트와도 같이 신비롭게 느껴지고, 자연의 푸르름과 삭막함이 뒤섞인 백을 보면 금방이라도 저 안에 짐을 가득 채우고서는 오렌지 나무가 가득 열린 남쪽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 진다. 이윽고 이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에는 나의 28인치 캐리어에 새것을 넣을 마땅한 공간이 없는데도 언제든 지갑을 꺼낼 수 있을 것처럼 마음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그것들로부터 다음 그다음 떠날 곳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예감은 불현듯 거울에 비친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이 여름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는다. 우리의 바캉스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을 깨닫는다. 손에 들린 것이 내게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나중에는? 영원히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가만히 셔츠를 내려놓고서 1층으로 내려가 통유리창 앞에 앉아 친구들을 기다린다. 방금 보았던 허무의 얼굴을 떠올린다. 형형색색의 옷가지를 들고 에스컬레이터가 위층에 닿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답답해 직접 걸어 올라가는 저 바쁘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자 그들을 따라 올라가 맨 위층 피팅룸을 차지하기보다는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옆에 앉아 있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내 옆에는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듯 지루해 보이는 얼굴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의 할 일은 ‘여자친구가 쇼핑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러나 그에게는 허무의 얼굴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이 시간들을 바라보는 것일까?





잠시 후 그와 나는 이곳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직원의 말에 일어났고 잠깐 동안 서로를 보고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마쯤 지나고 나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쇼핑몰을 나갔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시는 아까와 같은 느긋함을 보였고, 태양은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시내에까지 흘러 들어온 바닷가의 소금기 가득한 냄새가 내 코에 닿게 되면, 이제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 바다가 내게 던진 질문과 물결에 비췄던 투명한 얼굴은 내 마음속에 다시 넘실거리게 되어 포근했던 마음은 이내 차게 식어버리고, 짙은 모래색 건물들이 답답해지고, 흩뿌렸던 생각들은 제자리를 되찾고 마침내 한 단어만이 남는다.




방랑자! —


​​


그러면 나는 겨우 마음에 붙였던 시내와 활기 넘치는 사람들, 내 다정한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바다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날들이 다가옴을 깨닫고서는. 나의 향수와 함께 바다로. 그 어딘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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