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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imoriho May 21. 2023

꿈도 어느 매력적인 공상도 아닌

#7 때가 되면 벗어나야 한다.



눈 떠보니 올드타운이다. 바그다드 카페의 야스민이 홀로 버려졌던 황량한 사막은 없지만 내 앞에는 덩그러니 놓인 붉은 의자들이 있다. 각진 의자들은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건물들 위로 널린 빨랫줄에 거꾸로 걸려 있는 수십 개의 아랍풍 우산들이 내뿜는 총천연색의 빛을 받으며. 누군가 자신의 무릎에 앉아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녁이 되면 모든 것이 절정에 다다른다. 미의 절정. 감정의 절정. 깨달음의 절정.




좁고 어둑한 뒷골목에서 누군가 내 쪽으로 부는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 헤이- 언제나 욕구의 절정에 다다른 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쪽엔 더 이상 흥미가 없거든. 시큰둥한 눈빛으로 돌아보니 금목걸이를 찬 남자들 몇 명이 느린 힙합 리듬에 맞춰 흐느적거리며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한다. 나는 그들의 시선에 움찔거리다가 목마름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그림자가 내려앉은 골목에는 언제나 그렇듯 자리를 지키는 마켓이 있다.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 곧바로 1.5리터 생수와 음료수를 집어 든다. 계산대로 향하며 진열대 위에 놓인 신라면을 발견하고 선명한 한국어를 처음 본 듯 읽는다.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이요.

-여행하러 온 거예요?

-네. 이주 정도요.

-그다음은 어디로 가요? 계산을 해주던 프랑스 청년의 물음. 스페인이라고 대답하는데 그가 잠시 머뭇거린다.

- 이 카드 계산이 안되네요.

- 아, 잠시만요.

가방 속을 열어 카드와 지폐와 이어폰을 넣어둔 다 먹은 허니 캔디 종이갑을 꺼낸다. 지폐를 꺼내 청년에게 건네며 숙소에 두고 온 지갑을 걱정한다. 소매치기를 당할까 봐 캔디 갑에 귀중품을 넣어두는 나는 나는 한국인이다.

- 여행 잘해요! 느긋한 프랑스인은 내게 외친다. 서로의 이름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아무 강요 없는 대화에 긴장이 풀린다.


마트에서 나오자 꿈의 한 장면처럼 저녁의 예고가 시작되고 있었다. 바캉스 원피스와 초콜릿, 부채와 라탄 가방을 비롯한 기념품 가게들을 의식적으로 곱씹으며 지나쳤다.




잠시 후 골목을 벗어나 넓은 광장에 이르렀다. 어느새 내 옆에는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버스킹 하는 연인의 노랫소리를 따라 활기찬 광장 위를 활보했다. 해안가를 등지고 스핀 하는 비보이. 중년이 다 되어 노련한 그의 동작과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열다섯의 아마추어 중 과연 누가 더 순수할까? 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는다. 순수란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거라고.





매일 바다에 갔다. 8시가 넘어도 니스에는 햇살이 내리쬐었고, 해변 앞 TOPAZ 레스토랑의 2층 테라스에서는 여유로운 저녁식사를 선택한 이들이 빼꼼히 보였다. 동시에 바람 빠진 비치볼이 굴러다니고 트럭이 한순간 그걸 밟았을 때 아이들은 뛰어다녔다. 나체로 태닝을 즐기던 여자들과 높은 담벼락에 기대어 책을 보던 여인을 흠모하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간이 샤워기 아래 바닷물을 씻어내리는 커플이, 발바닥 사이로 찰팍거리는 물의 마찰음이 내 귀에 들려오면 돌아갈 시간이었다. 떠날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때가 되면 벗어나야 한다. 피날레를 장식하듯 마이클 우코프의 <Come to my world>의 장난스럽고도 폭발적인 리듬이 내 귓가에 맴돈다. 여름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음에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나머지 그날 밤 나는 열에 시달렸다. 아침이 되자 친구들은 내 모든 짐을 기꺼이 도맡았고, 나를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안착시켰다. 강렬한 햇살에 겉옷을 벗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한기를 느끼며 셔츠를 붙들고, 몸을 움츠렸다. 이륙과 동시에 지난 며칠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떠한 허기도 느껴지지 않는 꿈만 같던 시간들이 천 개의 조각으로 연결된 한 장의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니스를 떠나는 것은 단순히 이동의 의미가 아니야.


과거. 두려움. 그럼에도 대부분 설레었던 기억들이 파노라마 틀에 완벽히 끼어 맞춰 빛난다. 새로운 여정의 궤도에 들어서며 내게 말한다. 잊지 마. 네 앞뒤로는 친구들이 있어. 나를 이끌던 B의 붉게 탄 어깨가 신경을 자극하고, M의 눈물은 주위를 맴돈다. 나를 수호하는 아기 천사들처럼.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을, 페리를 타고 섬에서 또 다른 섬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그린다. 행복을 노래하는 마이클의 목소리와 함께 합창이 들린다. 열광적인 후렴구 속 돌고 도는 LA LA LA LA- 그리고 중심을 지키는 나의 세계. 지끈거리는 머릿속에 광선이 스친다. 그것은 꿈도 어느 매력적인 공상도 아닌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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