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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an 02. 2022

엄마라는 존재의 막중함

나나 잘하자

박혜란 님의 세 아들이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엄마가 박혜란 님이었기 때문이고, 오소희 작가님의 아들 JB가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엄마가 오소희 작가님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어머니의 어떤 자식이라는 것은 인풋과 아웃풋이 아주 확실한 일이다.


짧은 교사생활이었지만, 학부모 면담을 하게 되면 그 아이들이 아주 잘 이해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아이가 소위 문제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부모를 만나면 확실히 이해가 되고, 그 아이가 아주 괜찮은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어머니를 만나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물론 때때로 아닌 경우도 있었다. 형은 아주 괜찮은 아이로 소문났고 그 어머니도 참 좋은 분이셨는데, 그때 사춘기를 겪었는지 다소 엇나가는 아이도 있긴 했다(물론 그때 잠시 엇나간다고 아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즉 다 그렇다고는 분명히 할 수 없다. 하지만 80프로 이상은 "그 부모의 그 자식"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 속담에도 그것을 대변하는 말들이 아주 많은 것을 보면 분명 헛말은 아니다.


그러니 아이를 잘 키우려고 애쓰기 전에, 나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가진 이상으로 더 큰 무언가를 아이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인격, 내 성정, 내 생활습관, 내 학력 등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아이는 영향력을 받게 되므로,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면, 정말로 나를 잘 키워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다소 특별한 지식이라고는 조선왕비사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자주 인용하게 된다. 현대도 아이에게 미치는 엄마의 영향력이 대단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다. 아니 조선왕실에서는 엄마의 여러 능력치가 아들의 미래나 목숨까지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이방번과 이방석은 왕위와는 다소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신덕왕후가 이성계의 깊은 총애를 받게 되면서,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이방원 포함)을 모두 제치고 신덕왕후 소생 방석이 세자가 되었다. 신덕왕후는 아름답고 총명했고 기지가 대단했다. 하지만 그만큼 욕심도 많았던 것이다. 살아생전 신덕왕후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녀가 죽자마자 상황은 달라져서 방번과 방석은 이방원에 의해 어린나이에 죽음을 맞았다. 즉 엄마의 욕심 때문에 아들 둘이(더불어 사위까지) 제 명에 못 산 것이다.


이런 사례가 더 있는데, 인목대비 김씨 역시 아들의 죽음을 재촉했다. 이미 장성한 세자 광해군이 있는 상황에서 아들을 낳은 것부터가 불행의 시작인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인목대비는, 그 아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이미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아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제대로된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인목대비는 지혜롭지 못했다. 아들 영창대군을 위한답시고 부왕 선조의 총애(적통)를 강조했던 일(이것은 서자인 광해군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일이 된다), 영창대군 앞으로 엄청난, 헤아릴 수도 없을만큼 큰 부를 축적해준 일(왕족이나 가난했던 광해군을 더 자극하는 일)은, 인목대비가 완전히 오판한 일이다. 선조의 적통이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영창대군을 광해군은 살려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가 제 아들을 죽이고 싶겠냐만은, 결과적으로 신덕왕후나 인목대비는 자신의 아들들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비해 혜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를 성군으로 키웠다. 혜경궁 홍씨가 훌륭한 어머니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몇 가지 일화만 적어보겠다. 혜경궁은 남편 사도세자와 시아버지 영조의 불화의 원인을 정확히 알았고 아들 정조와 할아버지 영조사이에는 불화를 줄이기 위해, 어린 정조를 아예 시아버지 처소에 보냈다. 정조의 고모 화완옹주의 입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녀의 횡포도 모두 참아넘겼다. 그 외에도 많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혜경궁은 당시 아들을 위한 상황판단을 잘했고 또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인내한 훌륭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역시 당시 아주 정확한 상황판단으로 자식들의 앞길을 터주었다. 개인적으로 인빈 김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상황판단 능력과 처세술에서만은 인빈 김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는 처음에는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를 총애했으나, 그녀는 광해군을 낳고 얼마뒤 죽었다. 즉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 총애는 옮겨갈 수밖에 없는데, 다음 상대가 인빈 김씨였다. 그리고 인빈 소생의 2남 신성군이 똑똑해서 세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도 장남 임해군이나 차남 광해군이 아닌 인빈 소생의 아들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피난길에서 신성군이 죽게 되자, 급하게 세자를 세워야 해서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이다. (장남 임해군은 너무 난봉꾼이었고, 인빈 김씨의 다른 아들들도 비슷했다) 인빈은 신성군이 아닌 다른 아들을 세자로 세울 수도 있었을텐데, 아무리 제 아들이지만 왕 그릇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광해군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그리하여 인빈의 난봉꾼 아들들은 끝까지 광해군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고, 훗날 손자(인조)가 왕이 되는 상황까지도 전개될 수 있었다. 인빈은 욕심이 많았고 안하무인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녀의 그 정치감각(상황판단력)만은 인정해줄만했고, 그 결과 자식들도 잘 된 케이스다.


하지만 혜경궁은 좋은 어머니라고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인빈은 뭔가 꺼림칙한데, 혜경궁과 인빈의 가장 큰 차이점이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혜경궁은 왕족으로서의 기품이 확실히 있었지만, 인빈의 성품은 좋지 않았다. 인빈에 대해서는 성품을 칭찬할만하진 않고, 단지 정치감각과 처세술이 좋았다고 평가할 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핏줄이 훗날 왕좌에는 앉았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가 천지차이라고 생각한다.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는 조선의 성군으로, 인빈의 손자인 인조는 병자호란을 자초한 왕으로 역사에 남는 것이다. 즉 그녀들의 성품이 아들들의 행적에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까지 보면, 엄마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위의 왕비들 이야기에서 몇 가지 깨달음을 정리해보면, 첫째, 자식을 위한답시고 과욕을 부려서는 절대 안 된다. 둘째, 엄마의 현명한 사리판단이 자식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셋째, 엄마의 성품에 자식은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서, 박혜란 님은 저 세 가지에 확실히 들어맞는다. 어제 박혜란 님의 책을 읽고, 오늘 조선왕비 이야기에도 대입해본 건데, 역시나 같은 이치임을 확인한 것 같다. 박혜란 님은 절대로 자식에게 과욕을 부리지 않았고, 잠깐씩 흔들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면 소신을 꽤 잘 지켜내셨고, 박혜란 님의 안정되고 긍정적이며 바른 성품이 자식에게도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아이를 잘 키울 것이 아니라 엄마 자신이 아이와 함께 잘 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나나 잘하자. 나부터 잘하자.




그리고 감히 덧붙이면, 박혜란 님과 오소희 작가님이 이미 수없이 강조하고 계시지만, 엄마들이 현명하게 사리판단을 해야할 것 같다. 아이들을 입시위주의 교육체제에서 좀 빼내주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당장 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입시위주의 교육체제가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을 막고 있는 한 요소이기도 하므로.


아무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나 역시 그렇게 살아야할 것 같은 불안감에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 입시위주의 교육체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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