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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Feb 08. 2022

나는 잘하고 있는걸까

우연히 예전 동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내 휴대폰 사진폴더 중 다운로드된 동영상이 모여있는 폴더였다. 첫째가 영어유치원을 다니던 때 담임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동영상들이다. 그리고 그때 그 동영상을 받아 볼 때마다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이 이제서야 보다 명확하게 느껴졌다.  


발표시간, 우리 아이 차례가 되어 앞에 나와 원어민선생님의 영어문장을 따라하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원어민선생님의 발음을 따라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모습을 기특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아이가 긴장하고 있지만 그또한 발표 연습이라 생각했고,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발음을 해나가는 것 또한 잘하는 일이라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영상들을 남편에게 보내준 뒤 다시 꺼내보지는 않았다. 왠지 마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그 영상들을 보니, 그때의 불편한 감정의 이유를 알 것 같다.


여섯살 아이가 굳이 연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발표연습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고, 유창한 영어발음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여섯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함박웃음이었다. 긴장없이, 편안한 상태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까르르 웃는 것. 그것이 여섯살 아이에게 요한 것이었다.


그런 여섯살을 보낸 아이는 훗날 발표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경직된 상황에서 발표연습을 하는 것은 오히려 트라우마를 만들 수도 있다. 아니 발표쯤 유창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발표를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 못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사는 데 있어 그리 중한 문제도 아니다. 영어발음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잘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것이 성인에게는 물론 여섯살 아이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경직된 표정은 생일파티 영상에서도 비슷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카봇으로 맞춤제작한 케이크에 내가 정성껏 포장한 답례선물까지 생일상은 풍성했으나, 고깔모자를 쓰고 친구들의 축하노래를 듣고 있는 내 아이의 표정은 너무나 엉성했다. 그때 나는 아이에게 생일파티가 행복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아이는 행복했다고 대답했는데, 아이는 그 다음날도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아이 생일이 6월20일이고, 7월부터 유치원을 그만두었다.


그 생일 동영상을 오늘 시터이모님께 보여드렸더니, 이모님께서 "시완이엄마가 왜 유치원을 그만뒀는지 알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아이를 3년 넘게 보신 이모님 눈에도 그게 보이셨나보다. 아이가 웃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걸.


이모님께서는 올3월부터는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보셨다. 이제 7세인데 진짜 유치원 안 다녀도 되냐고. 나도 아직 고민 중인데, 아이가 기초학력이 부족하진 않고(읽기가 대충 되고, 연산은 잘하는 편이고, 영어는 과외 중), 사회성이나 규칙을 지키는 능력을 위해 유치원에 보내기엔 7세의 시간이 좀 아깝다고 말씀드렸다. 사회성이나 규칙을 배우는 것도 사실 초등학교 가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아이가 공교육의 틀에 들어가기 전 시간적 여유를 엄마와 함께 보내는 것이 더 가치있게 생각된다고 이모님께 말씀드렸다.


평소에 유치원 보내라고 말하셨던 이모님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역시 엄마가 중심을 잘 잡으니까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불안해하지도 않네"라며 나를 칭찬해 다. 이모님 역시 일곱살 아이가 할 일은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래 함께 지내다보니 가치관도 비슷해졌나보다. 아니면 원래 가치관이 비슷해서 이모님과 이리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걸까. 여튼 나는 이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좀더 확신이 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나를 위해 아이와 함께 있고 싶다. 아이가 다섯살일 때 아이를 유치원에 안 보 이유는 아이의 입장에서 유치원이라는 공간이 썩 편치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책 <정서적 흙수저 정서적 금수저>에서 저자가 아이의 입장에서 그 책을 썼다고 말했는데, 나 역시 아이 입장에서 유치원보다 집이 더 편안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일곱살이 된 지금 아이를 유치원에 안 보내는 이유는, 사실 나를 위한 면이 더 큰 것 같다. 물론 집돌이인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말해주니 가능한 것이겠지만, 일곱살 아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일이 나는 너무 다. 얼마전 2007년 작인 <라스트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처음 봤는데, 주인공이 생이 4주 남았다는 진단을 받게 되고, 그제서야 그동안 미뤄왔던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다는 영화이다. 내 생도 4주밖에 남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이들과 여행다니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러니 내가 좋아서 가정보육을 하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의 확실한 행복을 굳이 미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함은 남아있다. 노란색 스쿨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또래아이들을 보면 마음 한 켠 불안함이 고개를 든다. 내 아이가 너무 사회성이나 처세술이 떨어지진 않을까. 기본 지능이 좋은 아이인데(도치맘이라) 엄마가 조기교육을 경시하는 바람에 아이가 크게 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주위에서 다들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텐데, 교육학적으로도 5세부터는 기관에 가는 게 더 낫다고 하는데, 내가 너무 아집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아닌 내가 분리불안이 심한 건 아닐까.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982년 생인 내가 어릴 때 머리에 이가 있었는데, 그걸 잡겠다고 머리에 독한 약을 쳤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는 분이셨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랬듯 방안에서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우셨다. 그때는 그것이 아이에게 나쁜 것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쁜 줄 알고, 절대 아이에게 독한 약을 뿌리거나 아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과거 행동주의 교육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때 유행했던 행동주의 교육관대로 아이를 교육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교육관은 폐해가 더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지금은 그렇게 하지않는다.


나는 어쩌면 조기교육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인력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어떻게든 훌륭한 인력을 위해 조기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그것이 몇 십년 뒤에는 어쩌면 어릴 적 아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피우는 것만큼 나쁠지도 모른다고.


내 아집이나 내 분리불안일 수도 있고, 이제 겨우 7세를 키우는 엄마라 한참을 모르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느낌이 그렇다. 미취학 아동이 해야할 일은, 걱정없이 긴장없이, 엄마 곁에서, 심심할 때까지, 마음껏 노는 것이라고, 아이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저 즐겁게 노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어유치원을 다니고, 마치고 수학학원을 갔다가, 체력도 키워야해서 태권도 학원도 갔다가, 집에 와서는 숙제하고 잠만 자고 다시 내일을 맞이하는 건, 7세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삶을 계속 산다면 성인이라도 머지않아 번아웃이 올 것 같다.


그래서 나는 7세 때도 가정보육을 하려고 하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늘 물음표를 달고 살겠지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확신보다 불안함이 더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이 비슷한 지인이 오늘 보내준 글귀에 또한번 불안함을 잠재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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