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살아보는 여행-
나는 성공한 에어비앤비 덕후다.
2013년 유럽 여행 중 스페인 세비야에서 처음으로 에어비앤비의 공유 숙박 서비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때의 특별했던 경험이 계기가 되어 2017년부터 지금까지 에어비앤비 트립 고객지원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당시 내가 예약한 숙소는 집 전체가 아닌 호스트가 살고 있는 집에 개인 화장실이 딸린 방이었다. 숙소 페이지에 후기는 많지 않았지만 여성 호스트의 친절함과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Misho(미쇼) 그리고 숙소의 예쁜 인테리어를 칭찬하는 글에 큰 망설임 없이 예약 하기 버튼을 눌렀다.
장기 여행자의 가벼운 주머니를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유스호스텔에 묵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스페인 현지인들의 생각을 듣고 그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그때까지는 이름도 생소했던 에어비앤비를 선택했다.
숙소는 세비야 중심의 작은 플라자(광장)에 위치한 4층 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호스트로부터 미리 에어비앤비 메시지를 통해 안내받은대로 1층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잠시만 아래서 기다리라는 답을 주었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이 종종 그렇듯 엘리베이터가 없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호스트의 남사친이 내려와 익숙하게 제 몸집보다 큰 내 캐리어를 불평 한 마디 없이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자 호스트 블랑카(Blanca)는 마치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두 팔을 크게 벌려 나를 포옹하고는 양쪽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스페인식 인사인 Besos였다.
그녀는 막힘없는 영어 실력으로 현관문 열쇠 사용법을 설명하고는 미리 숙소의 위치와 근처의 맛집과 편의 시설을 표시한 지도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통과의례'를 마치자 비로소 스페인 남부의 무데하르 양식에 동양적인 요소를 조화롭게 섞어 멋지게 꾸민 거실과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거실의 한쪽 벽을 다 차지하는 큼지막한 창으로 쏟아지는 세비야의 강렬한 햇빛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와- 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집에서 특히나 특이했던 점은 모로칸 문양의 타일로 퍼니싱 된 거실 바닥에 컬러풀한 쿠션을 비치해 두어 마치 한국에 있는 우리 집처럼 좌식으로 생활한다는 점이었다.
블랑카는 낮에는 집 근처 스튜디오에서 요가를 가르친다고 했다. 그녀가 집에서 요가나 명상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내가 숙박하는 기간 내내 집 안에 향을 은은하게 피워두었다. 요가의 영향인지 집안 곳곳에 장식해둔 동양적인 아이템들에서는 그녀의 남다른 인테리어 감각도 엿볼 수 있었다. 숙소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블랑카의 취향을 알 수 있고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가 들리는 듯했다.
간단하게 얘기를 나누고 내가 예약한 개인실로 들어왔다. 호텔은 아니지만 호텔처럼 잘 정리된 침구를 보며 묘한 안도감과 고마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오랜 여행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조금은 지쳐있었는데 먼 타지에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위안이 됐었나 보다. 게다가 무려 내 방에 안에 욕조 딸린 화장실이라니!
항공 승무원 시절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정 붙이기 어려웠던 호텔도 아니었고 행여나 다른 여행객들에게 피해 줄까 노심초사하던 유스호스텔도 아니었다. 낯선 도시에서 마치 친구의 집에 초대받은 듯한 느낌의 아늑한 이 방이 앞으로 3박 4일 내 보금자리가 될 공간이었다.
각 잡힌 베드 시트, 책상 위에 적어둔 와이파이 비밀번호, 그리고 미니 냉장고 안에 미리 넣어둔 작은 생수 두 병에서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그 방의 구석구석 그녀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새로 맞을 게스트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무형의 감정이 깨끗하고 잘 정돈된 방이라는 형태로 눈 앞에 존재했다.
짐을 정리하고 욕조에 물을 받아 피곤함을 녹이니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옷을 갈아 입고 쭈뼛쭈뼛 거실로 나가자 블랑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 곧 있으면 친구들이랑 저녁 먹으러 갈 건데, 약속이 없다면 함께 가지 않을래?’.
찰나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녀의 초대는 곧 현지인들과의 mingling(어울림)을 뜻했다. 나는 바로 'Si!(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때부터는 마치 내가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으로 그날 저녁을 보냈다. 마법이 일어났고 그 한가운데 내가 있었으니 말이다.
블랑카가 나를 데려간 곳은 시내 중심가를 조금 벗어난 식당 겸 술집이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그날 저녁에 초대된 그녀의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우리는 늦은 밤까지 bar에서 bar를 옮겨 다니며 작은 접시에 나오는 세비야 최고의 타파스를 맛봤다. Montadito(스페인식 작은 샌드위치)와 Tortilla de patatas(스페인식 오믈렛) 등 다 셀 수도 없이 다양한 타파스를 와인에 곁들여 먹었다. 분명 여행책자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혼자 찾아가기 어려웠을 곳들이었다.
어떤 곳은 의자도 없어서 처음 보는 이들과 다닥다닥 붙어 서서 가슴 아래까지 오는 테이블에 타파스와 술을 올려두고 먹었는데, 주문을 하는 사람도 주문을 받는 사람도 목에 핏대를 세우지 않고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끄럽고 복작대는 재밌는 장면이 연출됐다.
꼬레아 델 수르(한국)에서 혼자 여행 온 내가 흥미로웠던지 블랑카의 친구들은 아는 영단어를 모두 써가며 나와의 대화를 시도했고 우리는 언어는 완벽히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손짓 발짓 눈짓에 깔깔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아지트라며 나를 데려간 곳은 세비야 까떼드랄의 후문과 분수가 보이는 길목에 위치한 작은 술집이었다. 역시 의자라고는 없는 그 술집에서는 소주잔 보다 조금 큰 유리잔에 오렌지로 담근 와인을 팔았는데 이는 오렌지 나무가 지천으로 있는 세비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술이라고 했다.
밤은 어느덧 깊어졌고 나는 조명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세비야의 까떼드랄과 히랄다 탑을 바라보며 오렌지 나무 아래서 오렌지로 담근 와인을 홀짝였다. 달콤하고 쌉싸름했던 그 향은 후에도 그 여운이 꽤 오래갔다. 아마 그날 밤, 그 순간이었으리라. 내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수도, 정열의 도시 세비야와 사랑에 빠진 것은. 플라멩코 춤의 본고장이자 관광객을 태우고 도시를 유유자적 선회하는 노란 마차들을 보자면 마치 중세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는 곳. 유쾌하고 정 많은 사람들의 도시.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때 읊조리듯 혼잣말을 했다.
‘언젠가 세비야에서 살아보고 싶다. 아니, 꼭 살러 와야지’.
실제로 나는 그 여행 이후 한국으로 돌아가 약 2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 마치고 1년 동안 세비야에 살러 갔다.
세비야에서 1년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Tinto de Verano(여름에 남쪽에서 마시는 상그리아 비슷한 음료)를 양껏 마셨고 스페인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를 체험했다. 악명 높은 세비야의 여름 태양을 피해 오후 2~5시 사이에는 꼬박꼬박 시에스타(Siesta: 낮잠 혹은 휴식)를 즐겼고 매사 여유를 갖는 그들처럼 No tengas prisa. Hazlo Mañana. (서두를 것 없어. 내일 해)의 리듬에 나를 맞춰갔다. 단골 가게도 생겼고 이웃들과 정겹게 인사도 하며 지냈다.
지난 여행 때 닿았던 인연으로 블랑카가 월세 내놓은 방 하나를 빌려 묵으면서 에어비앤비 공동 호스트(co-host)를 간접 경험하기도 했다. 블랑카가 바빠 게스트를 받을 수 없는 날에는 내가 하우스 메이트로서 그녀를 대신해 게스트들을 두 팔로 환영하고, 키를 건네고, 세비야의 명소와 맛집을 알려주었다. 물론 오렌지 와인을 파는 "우리의" 아지트도 빼놓지 않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도시에서 살아보듯 여행했고 여행하듯 살았다.
2016년에 에어비앤비는 블랑카와 친구들이 그 날 나에게 선물했던 '로컬 호스트가 제공하는 마법 같은 경험’을 실제로 ‘에어비앤비 트립’이라는 명칭으로 서비스화 했다. 그리고 나는 운명처럼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그 ‘트립’ 팀의 일원이 되었다.
에어비앤비 트립은 로컬 호스트가 본인의 취미나 기술, 그리고 전문 지식을 게스트들과 공유하는 서비스이다.
꼭 어떤 분야의 전문 자격증을 갖고 있지 않아도 그 분야에서의 충분한 경험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트립 호스트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본인이 나고 자란 동네에서 동네 주민만 아는 맛집들을 투어 하는 호스트들도 다수이다. 요리사는 요리사의 관점으로, 건축가는 건축가의 관점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또 사랑하는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에어비앤비 트립이 단순히 게스트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호스트가 기획하고 진행하는 액티비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배움, 경험, 혹은 만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단 게스트뿐만 아니라 호스트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나는 에어비앤비의 공유 숙박 서비스와 트립을 통해서 사람(호스트)과 사람(게스트)을 연결하고 '누구든 어디서나 소속감을 느끼는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믿는다.
Airbnb's mission: To make people around the world feel like they could “belong anywhere”.
나는 그 날 분명히 낯선 타지에서 소속감을 느꼈고 그때 내가 경험했던 그런 마법 같은 하루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언젠가 다시 오게 된다고 하던가?
세비야의 오렌지 나무 아래에서 오렌지 와인을 마시며 소원을 빌어도 꼭 다시 오게 되더라. 내가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