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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Feb 22. 2021

오래 간직할 물건 찾기

미니멀 라이프와 제로웨이스트를 접목한 선택

손거울을 새로 들이며


용기만 들고 다녔던 쿠션 팩트

작년 여름, 편해서 쓰던 쿠션형 팩트를 끊었다. 튜브나 펌프형보다 쓰레기가 자주 배출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퍼프 세척이 귀찮다 보니 셀프로 트러블을 증식시키는 것 같은 느낌도 덤으로 있었다. 그럼에도 외출할 때 지닐 손거울이 필요해서 본품은 버리지 않았다. 리필용기가 있던 공간엔 실핀이나 머리끈을 넣어 가지고 다닐 수도 있어 나름 쓸모도 있었다.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고 나는 멀쩡한 걸 잘 못 버리게 됐다. 누구에게나 멀쩡해 보이면 중고거래나 나눔을 했고, 내게만 멀쩡하면 필요를 찾아 계속 사용했다.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으나 손거울 대체품으로 적합해진 이 쿠션 팩트는 내게만 괜찮은 그런 물건이었다. 손거울 대체품, 그게 나의 필요였는데 남편에겐 그 모습이 약간의 구질함처럼 보였던 모양이지만.


 화장품 용기 어택*이 시작되고 사용하지 않는 샘플 용기와 다 사용한 화장품 용기들을 내놓았다. 쿠션 팩트 용기도 비움의 목록에 들었다. 하지만 당장 들고 다닐 손거울이 없으니 망설이다가 배출 리스트에서 조용히 삭제했다.


 제로웨이스트샵에 갔다가 다시 덜그럭 대며 들고 온 쿠션 팩트를 발견한 남편이 물끄러미 나를 봤다. 내 블로그 열혈 애독자인 남편 자신의 기억에 따르자면 쿠션 팩트는 비워져야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고민을 그렇게 하면서도 도대체 이걸 왜 비워내지 못하는지 내게 물었다. 나는 이 팩트가 멀쩡하기도 하거니와 비우고 나면 당장 사용할 대체품이 없고 거울을 굳이 돈 내고 사고 싶지도 않은 데다가 찾는다고 마음에 드는 게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남편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이틀인가 사흘이 지나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남편이 무엇을 시키든 관여하지 않지만 내용물이 궁금해 송장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수공예품'이라 쓰여있었다. 남자가 살 만한 수공예품은 뭐가 있나 싶었는데 갑자기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눈 거울이 떠올랐다.


 '뭐야..?! 그냥 거울도 아니고 수공예품이야?'

 '오우 씨, 얼마나 대단한 거야..?!'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부푼 기대감이 차올랐고 모른 척 남편이 포장을 뜯을 때까지 기다렸다.


 상자를 열고 천 주머니에서 꺼낸 손거울의 첫인상이란, "그 시절 사대부 여인들의 소품" 이란 전시가 있다면 진열됐을 법한 것, 딱 그 정도였다. 예상했던 형태나 무늬, 색은 아니었던 터라 나를 생각해준 마음이 정말 고마웠지만 표정 관리엔 실패했다. 눈치를 보던 가여운 남편은 반품할지 묻다가 자개 거울이라며, 핸드메이드고 가운데에는 못난이지만 진주가 박혀있는 것이라며 선택하게 된 매력과 장점을 어필했다.



남편이 선물한 손거울

 그리고 덧붙였다. 10년, 20년, 시간이 지날수록 너와 더 잘 어울릴 만한 것으로 고른 것이라고. 마지막에 덧붙여준 남편의 말이 참 따뜻했다.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갈 물건을 찾아준 거구나 싶어서. 함께 나이들 물건을 앞으로 고르고 싶다는 글을 기억해줬구나 싶어서.




알뜰함과 궁상맞음 사이


미니멀 라이프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제로 웨이스트라는 지향점까지 추가된 후로 가끔 알뜰함과 궁상맞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때가 있다. 보풀이 잔뜩 나거나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홈웨어로 선택했을 때, 유통기한 지난 얼굴 크림을 꾸역꾸역 발과 몸에 바를 때, 구멍 난 스타킹을 구두를 신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 번이고 신고 있을 때 같이.


 버리지 않았고 물건의 쓸모를 찾았으니 다 괜찮은 걸까, 자괴감이 들곤 한다. 습관처럼 늘 하던 일들인데, 물건만큼 내 몸과 내 생활은 존중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렇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날이 특히 많았다. 빨랫감이 섞여 검은 물이 든 속옷을 추켜 입고 요리를 하다가 기름이 튀어 얼룩진 잠옷을 그 위에 걸친 상태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거리낌 없는 하루하루였다. 문득 그런 나를 돌아보다가 이효리씨가 <캠핑클럽>에서 멤버들에게 이야기 한 남편과의 일화가 떠올랐다.


 의자의 밑바닥을 오래 사포질 하는 남편을 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보지도 않을 곳에 왜 이렇게 신경쓰냐'고 물었더니 '내가 알잖아' 했다던 그 일화, 남들은 몰라도 내 자신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는 순간이 많아져야 한다던 그 부분이.


 우리 삶에 미니멀 라이프와 제로 웨이스트가 녹아들면서 비우는 것보다 가지고 있는 것을 (이왕이면) 오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 있었다. 들이는 물건에는 더 책임감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여전히 그 생각과 신념은 우리에게 유효하다. 내 손때가 가득 묻은 물건들로 주변을 채우고 싶다. 하지만 '오래'를 위해 선택받은 것들이 '나에 대한 소홀함'과 동일선상에 놓이지는 않길 바란다.


 어쩔 수 없어서, 대체품을 찾기 귀찮아서, 너무 익숙해져서 보다 나 스스로를 존중한다는 느낌이 가득한 물건들이 주변에 놓이길 희망한다. 그런 마음으로 정한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그냥 미니멀'이 아니라 '미니멈+리치'였음을 자꾸 되뇌려 한다.


편하다는 이유로 실밥이 이리저리 풀려 쪼그라들고 얼룩졌지만 놔뒀던 속옷과 사실은 더 많은 곳에 구멍이 나 있던 팬티스타킹, 보온의 역할은 이미 사라진 기모 후드티를 비웠다. 누군가에겐 '고작 거울'일 아이템 하나가 내가 나를 돌보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 덕에 진행할 수 있던 비움이다.


 그리고 남편의 숙원 사업과도 같았던 쿠션 팩트도 보냈다. 뚱뚱하지만 가벼웠던 팩트 대신 배는 무거워 존재감을 톡톡히 드러내는 새로운 손거울. 한쪽엔 확대경이 달려있어 남편에게도 안 보여주는 덧니 하나를 자세히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손거울. 홀홀 웃는 할머니가 됐을 때도 야무지게 꺼내 쓰는지 남편이 꼭 지켜봐 주기를 :)




덧붙임

덕분에 외출 3대 필수품은 위와 같다. 남은 가죽을 재활용한 카드지갑, 뉴비 손거울, 1n살 손수건



* 화장품 용기 어택 : 올해 3월부터 환경부에서는 포장재질의 재활용 용이성을 평가하여 4등급으로 표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가장 재활용 난이도가 높은 화장품 용기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항의하고자 다 쓴 화장품 용기를 제로웨이스트 샵에서 수거하고 제조사에 보내는 소비자 중심 운동이 진행됐다. 2월 21일로 오프라인 수거는 종료됐으며 현재 온라인 서명 운동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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